한국 기업의 호주 시드니 현지 법인에서 20년 가까이 근무한 지인 한 분이 몇 달 전에 회사를 그만 두셨습니다. 월급쟁이들이 강제 퇴직 비슷하게 회사를 나오게 되면 토사구팽 이라는 말을 떠올리듯 그 분도 아마 그런 상황에 처했던 것 같습니다 .
떠밀리듯 직장에서 나오게 되니 난감하고 대책없는 심정이야 오죽 했을까요. 해외에 지사나 상사를 둔 한국 기업들은 아무리 나라밖에 사무실을 열었다 해도 기업 문화는 한국식을 따르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호주 현지 직장인들처럼 5시가 ‘땡’ 하는 순간 ‘칼 퇴근’을 할 수도 없거니와 , 한국 만큼은 아니라 해도 한국인 상사나 동료들과 퇴근 후 술자리를 함께하거나 2차로 노래방을 가는 일이 아무래도 잦습니다. 호주에 산다 해도 한국계 회사를 다니는 한 분위기상 어쩔 수 없이, 아니면 본인들이 좋아서 ‘한국의 밤 문화’ 를 옮겨오는 것입니다.
물론 한국도 요즘 젊은 세대들의 퇴근 후 문화는 기성세대와는 사뭇 다르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회사를 그만둔 그 분처럼 4, 50대 직장인들은 거의 비슷한 일상의 쳇바퀴를 돌면서 조직 생활을 해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 분의 퇴사 소식을 접하니 ‘ 중년 남성들은 무엇으로 사는가 ‘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듭니다.
직장인이라면 사무실 문을 나선 후, 자영업자라면 하루의 업무를 마감한 후의 ‘사생활 ‘에 따라 답이 달라질진대, 거개는 지금 말씀드린 것처럼 ‘술이나 한잔’ 하면서 저녁 시간을 보내겠지요.
한국의 직장 문화가 좀 스트레스를 받게 합니까? 그렇게라도 풀지 않으면 하루 이틀도 아니고 어떻게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겠냐 싶기도 합니다. 남자들 스스로가 ‘돈 버는 기계’라고 자조하며 그렇게 10년, 20년 일을 하다 어느 날 문득 은퇴를 하게 되겠지요.
사정이 이러니 한국의 중년 남성들 중에 일을 떠나 ‘나는 이런 사람이다’ 라고 달리 자신을 말할 수 있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요?
그러나 그 분은 달랐습니다. 가족들의 생계를 혼자 책임져 왔음에도 연륜만큼 경륜만큼 자신의 세계를 오롯이 일구어 왔던 것 같습니다. 그 분은 재즈 음악 분야에 남다른 열정을 가진 음악가이자 독서광으로 ‘직장인 아무개’ 말고도 자기를 표현하고 드러낼 수 있는 , 어쩌면 그 분의 참 정체성에 더 가까운 모습을 꾸준히 가꾸어 왔던가 봅니다. 직장인이라는 상투적 외피를 벗자 참 자기가 드러나면서 , 실직을 했는데도 하나도 안 초라해 보이고 오히려 더 멋지게 보였습니다.
한국계 회사를 다니면서도 용하게 그 물을 피했다고 할까요? 무슨 말이냐 하면 그 분은 마치 ‘호주 중년 남성들’처럼 퇴근 후 자기 시간을 잘 활용했던 것 같아서 입니다.
일전에 만났던 회사의 중간 간부로 일하는 40대 호주 남자 한 사람은 아마추어 도자기 공예가로서 10년 남짓 제작한 작품이 2백여 점에 이른다고 합니다. 직장 생활과 궤를 같이하는 평생 취미를 개발한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주말에 한번씩 가족들에게 봉사하는 마음으로 요리를 하는데 가히 수준급이랍니다.
직장일을 마친 후 하루 두 세 시간을 꾸준히 투자한 결과, 생업과는 구별되는 또 다른 성취를 이루어 가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비슷한 또래로서 활동적인 성격의 소유자들 중에는 운동 한 가지를 거의 선수 수준으로 연마하는 부류들도 있습니다.
마흔 살이 넘은 직장 남성으로서 가정과 일, 그리고 이렇다 할 취미생활까지, 속된 말로 인생의 삼박자를 고루 갖춘 그 사람의 사는 모습을 통해 이 나라 중산층 가장의 한 전형적 삶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전쟁 같은 출근길을 시작으로 자정이 넘어서야 곤죽이 되어 집으로 돌아오는 지친 일상의 반복, 여가가 생겨도 보통은 술자리로 보내는 타성, 일주일 동안 가족들과 얼굴 맞대는 날이라곤 손꼽을 정도로 공허한 한국의 직장인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롯이 개인만의 탓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말입니다.
물론 새벽잠을 설쳐가며, 혹은 올빼미족이 되어 영어 등 외국어를 공부하는 분들도 많지만 , 퇴근 후 외국어나 자격증 취득에 매달리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노동의 연장이자 휴식없는 고단한 시간의 연속이 아닌가 싶습니다.
순수한 호기심과 배움에 대한 열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승진이나 또 다른 밥벌이에 대한 준비를 위한 것이라면 말입니다. 돈을 좀 더 벌기 위한 투자 개념이라면 순수 취미라고 보긴 어려울 테니까요.
그 분은 직장 생활 동안 음악에 관련된 장비와 읽고 싶은 책을 사는 데 ‘솔찬하게 ’ 비용을 쓴 것으로 압니다. 그래서 평소 아내로부터 적잖은 구박도 받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이 지금 옹벽이 되어 실직의 칼바람에도 거뜬히 자존감을 지키고 새로운 일을 모색할 심적 여유와 내면의 옹골진 자신감을 피워올리는 걸 보면서 , ‘위기의 중년 남성들’ 이 무엇으로 살아야 할 지를 곰곰 되짚어 보았습니다.
글: 신아연
신아연은 1963년 대구에서 태어나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1992년부터 호주에서 살면서 호주동아일보 기자, 호주한국일보 편집국 부국장을 거쳐
지금은 같은 신문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한국의 신문, 잡지, 인터넷 사이트, 방송 등에
호주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블로그 http://blog.naver.com/shinayoun 을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