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아 조선의 치과계는 환희 속에서 당면 문제에 대응하느라 분주했습니다. 치과계 최초의 종합지로 1946년 5월 1일에 발간된 『朝鮮齒界』 창간호에는 당시 치과계 구성원들이 어떤 생각을 하였고 무엇을 위해 노력했는지 생생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 내용을 연재하면서 70년 전 선배들과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당시의 맞춤법이 지금과 적잖이 다르지만 원문 그대로 두었습니다. 정리: 조영수■ 집회와 소식 1. 조선치과의사회 진용위원장 안종서부위원장 문기옥서무위원 안병식 기획위원 이유경 방안자보건위원 학술위원 김문조 정보라 자재위원 조명호 문기옥조사위원 정도성 박영준 재무위원 박부영 박동상 평의원 박명진 조호연 박용덕 정용국 원재신 이양숙 홍사근 최의종 조기항 이형주2. 경기도치과의사회 위원 부서 결정3월 10일 결성된 경기도치과의사회 제1회 위원회를 3월 11일 상오 11시 치전회의실에거 개최, 위원 부서를 아래와 같이 결정하고 하오 1시 산회.위원장 문기옥부위원장 총무부위원 안병직 부위원장 이창용총무부위원 이유경 서병서 조명호 이성민 이희창보건부위원 박명진 정보라‘재무부위원 김연권 박영균3. 경기도치과의사회
이때 쯤 산의 나무를 가까이서 보면 분명 잎사귀도 없는 마른 갈색나무인데, 멀리서 보면 뭔가 옅은 연두 빛이 전체적으로 느껴지는 것처럼 학교 복도에도 그런 기운이 느껴진다. 2학기와 비교 할 때 학생 수도 같고, 시간표도 비슷하게 운영되지만 웬일인지 복도에도 학생들로 가득차고 게시판 앞의 분위기도 호기심과 생기가 넘친다. 또 복도를 지나다 보면 반가움에서 가던 걸음을 불러 세우는 아이들이 부르는 호칭이 다양해진다. 방학 중 현장임상 실습 현장에서 익숙한 호칭들이 입에 배여 있어 호칭만 듣고도 이 아이가 몇 학년인지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종합병원에 실습 다녀온 3학년들은 ‘과장님’이라 부른다. 또는 ‘원장님’이라고 하는 학생들은 개인의원 실습을 경험한 2학년들이다. 그리고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아이들은 이제 막 대학생활을 시작하는 마치 신혼부부에게 ‘여보’라는 호칭이 어색하듯 ‘교수님’이라는 호칭이 어색한 새내기 들이다. 이런 분위기들이 봄 학기를 활기차게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3년에 한 번씩 새로운 지도 학생을 만나게 된다. 올해 새로운 학생들을 만나 학교생활과 학칙, 교과목 소개 등의 오리엔테이션을 겸한 지도교수와의 상견례 시간을 갖기 위해 교실로 들
TV 드라마의 초창기 60년대에는 성우 출신 탤런트가 잘 나갔다. 동시녹음이 아니라 성우 목소리에 의존하던 영화배우가 쩔쩔맬 때, 대사부담이 없는 성우의 연기는 자연스러웠다. 반세기가 지난 현재 세계 대중문화의 중심축으로 성장한 ‘한류 드라마’는 지구촌 곳곳을 점령했지만, 지나친 ‘막장’ 경쟁으로 비난도 빗발친다.종편방송 출범으로 시장이 커지자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소위 건전드라마 ‘응답하라 88(응팔)’이 최고시청률 19.6%에 15초 당 광고단가 3천만 원대로 치솟아 지상파방송을 추월하고, 아이돌 특히 걸 그룹 멤버가 스타로 떠오른 것이다. 어리고 연기 경력도 짧은 이들이 잘 나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는 내공이다. 이르면 초등 때부터 혹독한 연습생 훈련으로 동작과 표정연기에 익숙하다. 둘째 연습을 통해 무대공포증(카메라 울렁증)을 자연스럽게 극복하여, 카메라가 무섭지 않으니, 60년대 성우들처럼 연기에 쉽게 몰입한다. 셋째 화면해상도가 SD에서 HD로 발전하자, 작은 주름살도 놓치지 않는 카메라 앞에서, 옛날 식 피부 관리나 성형시술은 그 한계를 드러낸다. 선명도(鮮明度)의 극치라는 UHD(Ultra High Definition) 방송이 시작되면 ‘
이번 칼럼에서는 호주 기업 노조들에 대해서 이야기 드려볼까 해요. 제가 일하고 있는 국립병원 안에 치과를 대변하는 노조가 있다는 이야기는 몇번 들은 적이 있지만 저 역시 노조에 대해서는 잘 몰랐어요. 실제로 노조원들을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도 없었거든요. 제가 병원 노조에 대해서 처음 알게 된 계기는 2012년 저희 국립병원의 노조에 가입된 치과 간호사들이 같은 직급의 프론트(?) 직원들보다 급여가 적다는 이유로 서류담당 일을 일체 거부한 일 때문에 노조에 대해서 알게 되었지요. 당시 치과 간호사들의 불만이 어쩌면 당연했던 이유는 치과 간호사들은 치과의사의 진료 및 치과 치료 관련 일 이외에도 차트관리나 환자들 진료 예약 등 프론트 직원들이 하는 모든 일을 하면서도 서류 작업만 하는 프론트 직원들 보다 급여가 적었는데, 상식적으로도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죠. 그 당시 제가 일하고 있는(지금도 그렇지만) 차터스 타워스 병원에서는 노조에 가입된 치과 간호사들이 없었기 때문에 당시 사태를 동료 치과의사로부터 이야기만 듣고 특별히 관심을 가지지 않고 지나갔어요. 그런데 몇일 전 국립병원 치과 노조 직원들이 저희 병원을 찾아 왔습니다. 치과의사와 치과기공사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아 조선의 치과계는 환희 속에서 당면 문제에 대응하느라 분주했습니다. 치과계 최초의 종합지로 1946년 5월 1일에 발간된 『朝鮮齒界』 창간호에는 당시 치과계 구성원들이 어떤 생각을 하였고 무엇을 위해 노력했는지 생생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 내용을 연재하면서 70년 전 선배들과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당시의 맞춤법이 지금과 적잖이 다르지만 원문 그대로 두었습니다. 정리: 조영수경기도치과의사회 창립총회는 46년 3월 10일 하오 2시부터 치전 회의실에서 동회 창립준비위원 及 한성, 개성, 수원 각 지부 대의원 20여명, 내빈으로 조선치과의료상공조합 위원장 차문식, 동 총무위원 김문기 양씨, 본사측 최, 이, 황 3씨 차씨 참석하야, - 개회선언 - 국기 경배 - 애국가 봉창 - 개회사(경과보고) - 내빈 축사 - 의장 선정 - 회칙 초안 검토 - 임원선거 - 기타사항 - 폐회의 순서로 성대히 개최, 기념촬영을 하고 동 6시 30분 폐회 후 아서원에서 간친연을 베풀었다. 선출된 동회 임원은 ▲위원장 문기옥 ▲부위원장 안병식, (수원)이창용 위원 ▲박명진, 정보라, 조명호, 이유경, 이성민, 김연권,
고대하던 이차크 펄만을 대전예술의 전당에서 만났다(11월 14일). 20세기 후반 최고의 바이올린 연주자라는 이름에 전혀 손색이 없었다. 1945년 텔아비브 태생으로 7순을 맞아 월드투어중인 그가 여전히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비결은 무엇일까?첫째, 누구보다도 섬세하고 세련된 기교로 설명되는 천재적 연주 실력이다. 둘째, 네 살 때에 앓은 소아마비로 평생 휠체어를 타는 몸이지만, 항상 미소를 잃지 않는 낙천성과 따뜻한 인간애가 있다. 셋째, 마치 하체로 풀지 못할 운동신경을 보상하듯, 연주 중 연출하는 천의 얼굴·만의 표정이, 못 다한 몸짓언어를 덮고도 남는다.넷째, 어떠한 난(難)곡도 아름다운 음색으로 쉽게 풀어내는 그만의 해석과 프레이징과 비브라토가 있다. 그 밖에도 듣는 사람에 따라 붙일 말과 호 불호가 다양하겠지만, 지난 반세가 가까운 세월 인기도 1위라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으리라. 세월의 무게에 눌려 얼마나 변했을까 하는 걱정은 첫 곡의 첫 소절에 날아갔다(Leclair 바이올린 소나타 제 3번 D장조, Op. 9). 휴게시간에, 소름 돋도록 감미로운 선율이라는 표현이 필자뿐 아니라 현역 바이올리니스트들의 이구동성이었다. 셋째 곡 봄(베토벤 바이올린
가정식 백반'이라는 표현은 대체 어느 별에서 온 말일까요? 식당밥이란 것에 지치고 식상해진 사람들에게 돌아가신 할머니나 어머니 손맛을 재현해주겠다는 소박한 생각이거나 혹은 이를 이용해 돈을 벌겠다는 응큼한 표현은 아닌지요. 결국 어머니(혹은 할머니)나 집사람이 해주는 일상의 건강 밥상을 차려주겠다는 말이겠지만, 말처럼 그에 부응하는 식당이 대체 얼마나 있겠습니까? 실제 가정식 백반이라는 표현의 원조는 우리나라가 아니라 일본일 겁니다. 교토의 가정식 백반이니 동경의 가정식 백반집을 소개하는 책자들이 예전부터 여럿 나왔으니까요. 소설가 양귀자가 홍대 근처에 차렸던 '어머니가 차려주는 식탁'이라는 밥집이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그런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한 곳이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계모가 차려주는...'보다 못한 밥맛이라고 하였던가요.. 허나, 근사한 한정식이나 궁중요릿집 혹은 고기 전문 식당을 빼면 가정식 백반집 아닌 곳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곰곰 생각을 해보니, 가정식 백반을 표방하는 식당들은 무슨 찌개니 무슨 구이니 하는 단품 메뉴 리스트도 있지만, 정해진 메뉴 없이 직장인들을 상대로 주인장 마음대로, 손 가는대로 차려주는 밥, 반찬 그
1950년대 말까지 길거리 불심검문이 흔했다. 군대를 안간 기피자(draft-dodger) 적발이 목적이었다. 휴전(1953) 직전까지 매일 수백 수천 명이 죽고 다치는 상황을 지켜봤고, 종전이 아닌 언제 또 터질지 모를 휴전상태(cease-fire)에서, 누가 입대하고 싶겠는가? 힘 있고 돈 많으면 외국유학을 가고, 서민들은 모 정치인처럼 오른손 검지(방아쇠 손가락)를 자르거나, 머리 깎고 중이 되어 기피를 했다.고은 시인이 일초라는 승명으로 절에 있던 시기와 일치한다(1951-62, 18-29세). 동년배들이 생사를 걸고 군에 복무하는 동안, 미당 서정주의 추천을 받아 등단하고(1958) 남다른 편애까지 받았으니, 결초보은해도 모자랄 은혜였다. 환속하고 독재에 맞서 재야의 길을 걸으며, 육군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거쳐 “참여시인”이 된 것은 본받을만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미당이 서거하자(2000. 12. 24) 한 해도 지나기 전에 에세이 “미당담론”을 발표하여(2001. 5. 23), “역사의식 없이 권력에 안주” 또는 “미당의 시적 성취가 기만성에 바탕을 두고” 등, 듣기 거북한 비난을 쏟아낸 것은 유감이다.순수문학이냐 참여문학이냐의 결정도 스승 미당
나는 클래식음악을 좋아한다. 그런데 우리 집 아이들은 학교 다닐 때 주로 듣는 음악이 팝송 아니면 가요를 즐겨 듣는 듯 했다. 그러나 한 번도 그들의 음악 취향에 대해 간섭하거나 내가 좋아하는 음악 쪽으로 강요해 본적도 없다. 그런데 요즘 와서 모두가 클래식 음악의 신봉자(?)가 되어 있는 게 아닌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내가 그 나이에 음악을 좋아했었던 모습과 비슷한 모습을 자식들에게 발견하면서 세삼 신기하고 놀랍기도 했다.아버지의 유전인자를 닮아서 인가? 아님, 아버지의 문화를 모방하거나 문화적 유전을 한 것인가? 하기야 요즘의 생물학적 견해에 의하면 문화의 전달도 진화의 형태를 취하고 마치 유전자 전달과 똑같은 과정을 그친다고 한다. 유전자는 복제되는 것이 특징이다. 문화의 전달도 유전자처럼 복제기능이 있다는 것이다.문화를 전달 또는 모방하는 사회적 관습의 단위를 밈(meme)이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진화생물학자 리처드디킨스(Richard Dawkins)이다. 유전자가 정자, 난자를 통해 하나의 신체에서 다른 신체로 건너뛰어 퍼지는 것과 똑같이 밈(meme)도 모방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한 사람의 뇌에서 다른 사람의 뇌로 건너뛰면서 퍼져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아 조선의 치과계는 환희 속에서 당면 문제에 대응하느라 분주했습니다. 치과계 최초의 종합지로 1946년 5월 1일에 발간된 『朝鮮齒界』 창간호에는 당시 치과계 구성원들이 어떤 생각을 하였고 무엇을 위해 노력했는지 생생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 내용을 연재하면서 70년 전 선배들과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당시의 맞춤법이 지금과 적잖이 다르지만 원문 그대로 두었습니다. 정리: 조영수■ 新치과의학 건설을 위한 투쟁(上)建國途上의 一學徒로서 생각나는대로 소감을 말하겠다.해방 후 조선학도대의 일원으로 치안유지에 협력하고 있다가 정권 수립이 容易히 완성되지 않음을 알고 學隊는 학원으로 도라왔다. 우리는 우리의 요구와 임무를 규정하야 다음과 같이 학생회 강령을 가결하였다.(1) 우리는 제국주의적 잔재를 일소하고 진정한 민주주의국가 건설에 협력함.(2) 우리는 학문의 자유와 학원의 자치를 확보함.(3) 우리는 조선의 전국민 특히 노동대중을 위한 新치과의학 건설에 邁進함.즉 지금까지 우리가 받아온 교육에 대한 반성 及 그 보충으로 임무수행의 출발점을 정했다.우리는 제국주의의 모순과 현 정세에 대한 그 경제제도를 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