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회의 많은 사람들은 옛날보다 훨씬 잘 살게 되었는데 우울과 불안, 고독감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이런 상황을 견디기 위해서 무엇인가에 탐닉하고 열망하며 자신만의 즐거움을 위해 다양한 중독(몰입) 대상을 찾아 방황하고 있다. 일중독, 도박중독, 인터넷 중독, 쇼핑 중독, 성중독 등이다.사회는 개인의 욕망을 만족시킬 수 있는 장치를 개발하여 끊임없이 우리 앞에 펼쳐 놓는다. 좋은 술을 계속 개발하고 식도락을 부추기고 어른용 장난감, 도박, 매음 그리고 약물남용 등이다. 건전한 행복을 얻지 못할 때 사람들은 이런 퇴행성 장치를 통해서 자기의 욕망을 분출하며 대리 만족을 얻으려고 한다. 현대인들의 삶속에 과상 자극(Hypernormal Stimulate) 현상을 너무 많이 접하고 있기 때문에 극단적인 흥분과 희열을 너무 쉽게 자주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다.환상적인 화장법이나 성형술로 눈부시게 꾸며진 배우나 모델의 얼굴에서 또는 인공적으로 합성되어 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퍼포먼스의 드럼이나 악기소리, 예쁘게, 우아하게 질서 정연하게 진열해 놓은 상품의 모양 등은 일상생활과는 다소 동떨어진 자극을 우리에게 전달한다. 특히 비디오 게임이 주는 통쾌감 때문에 많은 사
오락이라고는 영화 관람이 거의 전부였던 5, 60년대에, 중고생과 군경(軍警)은 입장료가 반액이었다. 국가가 소멸될 위기에서 신명을 바쳐 대한민국을 구해낸 제복의 젊은이들에게는 짧은 휴가를 보낼 곳도 별로 없었으니, 마음 같아서는 무료입장이라도 시켜주고 싶었으리라. 학생은 왜 깎아주었을까? 우선 좋은 영화 관람은 수업의 연장이다. 관객이 적은 시간대에 단체입장을 유도하는 극장의 전략도 있다.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직 배우는 단계에 있는 어리고 미숙한 학생은, 열심히 영화를 만든 제작자·감독의 깊은 뜻을 절반도 이해하지 못한다. 따라서 아이들에게 어른의 요금을 받기는 좀 미안하다.”, 그런 의미도 있지 않을까? 문재인씨는(당시)작년 12월 원전의 공포를 그린 재난영화 ‘판도라’를 관람하고, ‘탈 원전 정책’에 대한 결심을 굳힌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영화사 측은 당시 관람요금의 최소한 절반은 돌려주어야 한다. 개봉 당시도 그랬지만 다시 봐도, 원자력 발전소를 없애자는 판단은 영 이해할 수가 없으니까. 서두에 “이 영화는 전부 허구(虛構)”라는 멘트가 나오고, 엔딩 크레딧 부분에는 판도라의 신화를 빌려, “한 가지, 희망은 남아 있다.”라고 말하지 않는
존 포드의 명화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How Green Was my Valley, 1941.”는 격변의 20세기 초 남부 웨일스 탄광촌이 배경이다. 가파른 경사를 따라 돌로 지은 6-8 채쯤의 그림 같은 연립주택을 Terrace라고 부른다. 단독주택은 Detached House, 두 집을 잇대어 지으면 Double Detached다. 대부분 영국인들이 이런 집에서 산다. 대도시에서 이따금 ‘고층 주상복합’이 눈에 띠는데, 막 이민 온 노동자 등 극빈자를 위하여 지방정부가 지은 ‘값싼 임대아파트’로, 플랫(Flat)이라고 불린다.저 건물에 화재라도 나면 어쩌나 싶더니, 얼마 전에 24층 그렌펠 타워 대형 참사보도를 보았다. 영화 ‘나의 계곡’에서 모건 집안 여섯 부자는 모두 광부인데, 막내(Richard Llewellyn의 자전소설) 만은 광부를 면하라고, 온 가족이 합심하여 학교에 보낸다. 일찍이 잉글랜드의 에드와드 1세가 정복하고(1282), 헨리 8세가 완전 합병한, 웨일스의 석탄은 영국 산업혁명을 떠받쳐준 동력이었다. 켈트의 나라 아일랜드는 5세기에 성 패트릭에 의해 카톨릭 화 했으나, 잉글랜드 헨리 2세가 침략하여 대군주로서 원격통치를 한다(117
-흰 가운을 벗어던지자-의사를 생각하면 문득 흰색 가운(gown)을 연상하게 된다. 흰 가운이 의사의 심볼인 것처럼 된 셈이다. 하긴 미용사 요리사까지 요즈음 흰색가운을 입긴 하지만 같은 흰색의 가운이라 하더라도 그 느낌은 매우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같은 흰 가운을 입었다고 해서 미용실을 병원으로 착각할일도 없을 것이고 병원으로 이발, 미용을 하러 갈 일도 물론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얄팍한 흰 천에 불과한 것이긴 해도 그것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은 매우 다른 것이다.그렇다면 의사들이 입은 가운을 왜 처음부터 흰 색을 택했을까? 아름답고 고상한 색이 허구 많은 중에서... 하지만 역시 흰 빛깔로 선택한 것이 잘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희다는 것은 그만큼 깨끗하고 신성하다는 느낌을 주고 있음을 물론이거니와 만일 가운을 사람의 피 색깔과 같은 붉은 천으로 만들었다면 의사들은 ‘사람의 피’를 소홀히 취급하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붉은 가운데 피가 묻었기로서니 흔적이라도 있을 것인 반면 새하얀 가운데 ‘떨어진 피 한 방울은 소중함이 한결 선명하게 두드러져 보일 것이기 때문이라 생각하는 것은 필자만의 억측일까? 가운의 흰 빛깔이 갖는 시각적 상징성 때문에 의사들이
현재의 달라 가치를 7, 80년대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GNP가 3-5천불을 넘어갈 때 식료품수요가 폭발적으로 늘고, 식재료의 질(육류 비율)에도 변화가 온다고 한다.다시 소득이 한 단계 더 올라가면 비만과 혈압에 신경을 쓰고, 양보다 질, 특히 맛을 즐기는 식도락 수준으로 올라선다. 한국인의 평균수명이 가파르게 높아지면서 고령인구시대를 맞이하였다. 백세시대를 바라보며 이제는 암은 물론이요, 고혈압·당뇨병 같은 ‘침묵의 살인자’, 즉 성인병을 두려워한다. 그리하여 TV 채널은 소위 ‘먹방(먹을거리 방송)’이 점령하고, 신문·잡지는 건강식품 심층취재가 대세다.신종 직업 ‘방송인’의 지위에 셰프(요리사)가 대거 진출한지 오래요, 내과·가정의학과의사는 물론, 영양사와 약사 한의사가 패널을 장악하여 인기인(Celebrity)이 되었다. “과연 전문직업인이 맞아?” 할 만큼 피차에 아슬아슬하게 비전공 영역을 넘나들면서, 구수한 입담을 풀어낸다. 평균수명 30 안팎이던 4백여 년 전 의학백과전서인 ‘동의보감’이, 음식과 환경이 변하고 고령화된 현대인의 암이나 성인병에, 만능해결사로 인용되는 현상도 또 하나의 ‘불가사의’다. 몸에 좋다면 남아나는 것이 없는 나라에 현
신흥초등 4학년(1952) 우리 반에는 청소당번 외에도 또 하나의 일거리가 있었다.학교 뒤에 흐르는 대동 천을 따라 메뚜기와 개구리를 잡으러 다녔다. 여름 방학에도 돌아가며 선생님 댁 오리를 먹여 살린 노동력 착취(?)였는데, 사실 나눠주시는 알사탕보다 사냥(?) 자체가 즐거운 놀이였다. 물자가 귀한 전쟁 중에 달걀보다 큰 오리 알과 고기는 꽤 잘 팔려, 교사의 박봉에 오리 사육은 짭짤한 부업이었으리라.건강보험이 확대된 1980년대 중반에 각 구마다 조합이 있었다. 이사장은 은퇴한 여당국회의원 선거참모요, 의사 다섯쯤이 무보수 이사였다. 전산화가 이루어지기 전이니까 예산의 30%가 인건비요, 월례회 겸 점심식사는 흔히 오리 로스구이였다.느끼함을 잡으려고 겨자와 부추절임을 곁들여도 별로 당기지 않지만, 경비절약을 위한 선택이니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때만 해도 오리고기 값이 착했으니까. 금수저도 아니요 인상도 별로인 닉슨 대통령은, 외교에 집중하여 취임 다음해부터 핑퐁외교로 군불을 때더니, 드디어 베이징으로 날아가 꽉 막혀있던 중·미관계(Sino-American Relation: 1972)를 풀었다. 마오가 대접한 페킹덕은 명나라 주원장 때부터 명성이 높던
우리는 지금 과학, 의학, 기술 분야의 눈부시게 진보된 시대에 살고 있다. 지식사회의 혜택을 누리면서 다가올 미래사회에 대해서 긍정적인 예견을 하면서 낙관적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지식의 무한증가나 과도한 지식업적의 결과는 그 나름대로의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많은 지식의 업적들 중에는 매우 쓸모 있는 것도 많지만 상당한 것들은 극히 짧은 기간 동안 융통성을 발휘하다가 이내 잊혀지고 사라져 버리는 것들도 많다. 학문적 가치의 깊이가 없고 쓸모없는 이론들만 양산하는 결과를 초래하여 지식의 태화현상이나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학문적 인식에 대한 불신감 마저 생겨나기도 한다. 지식생산의 인플레이션 파도 속에서도 반짝이는 중요하고 긴묘한 지식들이 속속 등장하기도 하므로 우리는 학문적 연구를 게을리 할 수는 없는 일이기도 하다. 지식의 인플레이션 현상은 우리 인간에게 위협적인 공격의 화살을 겨누기도하고, 그 지식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인간을 파멸로 이끌수도 있다.특히 자연과학적인 지식의 진보는 인간적, 윤리적 기본소양이 빠져 있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미래의 불안과 위협을 예견하기도 한다. 과학적 지식의 진보는 단순히 지식이 얼마나 많이 생산되고 축
“해동 육룡이 나라샤...” 미천한 조상 6 대를 미화하여 이성계의 쿠데타를 합리화하려고 만든 건국 신화다. 로마는 별로 영양가 없는 브리튼을 침공한 시저에 이어(55 BC) 스코틀랜드마저 정복하려 했으나, 픽트의 저항에 부딪혀 하드리아누스의 장벽(Wall) 까지 후퇴하고 만다. 벽 뒤에 숨어 수세로 전환한 끝에 식민지배는 끝난다(409). 보다 앞서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북방 기마민족의 침입을 막으려고 만리장성을 쌓았지만 진나라는 15년 만에 무너졌다(221-207 BC). ‘정관의 치’로 대표되는 중국의 황금기 당나라도 3백 년을 채 못 채웠다(618-907). 이(異)민족이 지배한 요 서하 금 원(遼 西夏 金 元)의 360년과 만주족의 청나라 270년, 춘추전국시대와 위진남북조·5대 십국의 혼란기를 빼면, 대제국으로서 한(漢)족의 지배기간은 더 줄어든다.장성 뒤에 숨어 폐쇄적으로 지키는 자세는 대제국의 위풍당당과 거리가 멀다. ‘잠자는 사자’라던 중국은 아편전쟁의 결과 ‘종이호랑이’임이 드러나고(1860 베이징 조약), 서구열강의 반식민지로 전락한 채 근대화를 시작하여, 백여 년 뒤 마오의 공산국가로서 다시 선다(1949). 그러나 정권에 집착한
나를 입고 내가 두른 살들과 한 몸으로 여기까지 왔다오행이 다 들어와 있다는 내 사주팔자에도 필시살(肉) 사이사이 마블링처럼 살(煞)이끼어 있음이 틀림없는데내 안과 밖의 살들은 내 정신과 육체의 실존이어서나의 상징이자 정체성이었던 볼살 허벅지살에생존을 위한 애교살 애살에 엄살까지… 더해 가며…살들과의 전쟁에서 하루도 자유롭지 못했지만, 모질지 못하여한 근의 살도 쉽게 덜어내지 못했다.울엄마 난산에 나, 몸에 피를 묻히고 태어났는지도화살에 뭇 남자들이 던져준 난분분 꽃잎으로 쉬이 붉게 물들었고역마살에 마음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계절마다 가슴앓이, 고독과 벗해왔으며백정의 드센 팔자라는 백호살에 손에 피 묻히며 살풀이하듯 살아왔다하지만, 나불화하던 오랜 살들과 조금은 화해하게 되었으니볼살 허벅지살은 동안과 젊음의 대세가 되었고도화살 덕분에 시인 이름 얻었을 것이고역마살 타고 내 발걸음은 세상 저 멀리 달려나갈 것이며외과 계통 의사들에게 백호살이 많다니내 직업 선택을 자위함이다차도르나 브르카 안에 내 안팍의 살 다 가리고그대 앞에 서고 싶었으나…나 이제, 늘어나는 뱃살 나잇살 주름살까지 영영 동행할 나의 실존으로 받아들이려 하니 살아 살아, 나의 살들아!사라지지
벼르던 영국 일주여행을 열흘간의 주마간산으로 대신했다. 보는 즐거움보다는 못 몰 꼴 안 보는 것이 더 행복한 가운데, 이낙연 총리 지명 소식은 그나마 한줄기 위안이었다. 지난 20개월 남짓, 생명보다 더 소중한 붓을 꺾었던 고 천경자 화백의 ‘분노조절장애’로 시작하여, 분노와 증오가 불러온 세계적인 반(反)지성 물결의 정확한 한국판인 최순실-박근혜 사태까지, 모두 40여 편의 글을 썼다. 시차관계로 절반밖에는 실리지 않았지만, 분석과 진단에서 무리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소용돌이 가운데 광주일고와 서울법대를 나와 동아일보 논설위원을 하고, 4선 의원과 전남지사를 거치는 동안, 신중과 온건함의 대명사로서 명 대변인의 별명을 얻은 이낙연 총리의 인품을 높이 산다. 취임사에서 “촛불혁명은 정부의 무능·불통·편향에 대한 절망적 분노에서 출발해, 새로운 정부 가동에 대한 지지로 전개되고 있으며, 공직자들은 촛불혁명의 명령을 받드는 국정과제의 도구들”이라고 말했다.그의 진단과 소명의식은 그가 문재인 대통령을 포함한 집권세력을 통 털어, 가장 올바르고 뛰어난 군계일학(群鷄一鶴)의 인재임을 웅변한다. 적폐의 청산이라는 날 서고 보복적이며 낡아빠진 증오감을 초월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