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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일 칼럼

Anonymous 와 觀相

김태일의 ‘Probe’ ③

 

 

 

 

필자는 드라마(drama)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의 인생 자체가 드라마인데 굳이 작가의 힘을 빌려 인생체험을 하는 것에 매력을 못 느끼기 때문이다. 특히나 국내 드라마는 사랑(love)이라는 주제에 지나치게 집착을 하기에 인생의 다양한 측면에 대해 간과할 위험성이 있어서 더욱 그러한 지 모르겠다. 그러나, 드라마 장르의 영화는 한번으로 끝나는 제한된 상영시간 내에 다면적인 인생을 압축해서 넣은 관계로 관람하고 난 뒤에 에스프레소 더블 샷을 들이킨 느낌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최근 지인들의 권유로 한재림 감독의 觀相이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다. 癸酉靖難을 소재로 그 동안 많은 영상물이 쏟아져 나온 관계로 덤덤하게 객석에 앉아있던 필자는 영화관을 나설 때엔 2011Roland Emmerich감독의 Anonymous를 보고 난 후의 중량감을 간직하며 나오게 되었다.

수양대군과 좌의정 김종서가 왕권에 대한 입장을 달리하며 조선의 운명을 좌우하는 사실에 觀相家를 배치하여 가정을 용납하지 않는 역사의 필연성을 보여준 觀相William Cecil 수상과 Edward de Vere 백작이 Elizabeth 1세 주변에서 상이한 방식으로 영국의 앞날을 도모하는 와중에 Shakespeare를 등장시켜 냉혹한 역사로 귀결되는 Anonymous의 플롯과 기묘하게 닿아있다. 역사에 관여할 수 있는 인간의 한계에 대한 관심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뜨거운 것 같다.

 

현대의 학계에도 최근 대단히 흥미로운 사건이 벌어졌다. 하버드 대학에 기반을 둔 생물학자이자 과학 저널리스트인 John Bohannon 이 올해 9월에 전문가 심사(peer-review) 제도를 채택한 개방형 학술지(Open Access Journal) 들을 대상으로 허구의 논문을 투고하여 무려 50%가 넘는 게재승인을 받은 사실을 Science 지에 발표한 것이다.

 바람직한 학문환경구현을 위해 구독형 학술지(Subscription-Based Journal) 진영과 개방형 학술지 진영이 벌이는 싸움은 앞서 소개한 영화들보다 더 치열하다. John Bohannon 의 엉뚱한 실험은 이제 Science를 넘어서 British Medical Journal을 위시한 전세계의 저명 학술지들에서 회자되고 있으며, 이것은 2000년에 갓 출범한 개방형 학술지 진영에 대한 관록 있는 구독형 학술지 진영의 회심의 일격이라는 말도 떠돌고 있다. 실제로 Wolters Kluwer 출판사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자사 학술지 중 Journal of Natural Pharmaceuticals의 폐간을 결정하는 수모를 자청하고 있다.

 

다행히 이번 실험대상 중 하나로 지목되었던 국내의 모 의학학술지는 편집장의 혜안으로 해당 논문에 대해 게재거부 판정을 내림으로써 대한민국 의학계의 건전성을 입증하였다. 의학 학술연구출판분야의 바람직한 미래를 위해 결성된 대한의학학술지편집인협의회(의편협) 에서도 이번 사안에 대한 해당 의편협 회원 학술지의 적절한 대처에 높은 평가를 내리면서 향후 모든 회원 학술지들을 대상으로 각별한 주의를 환기시킬 예정이다.

 

지나간 역사를 바라보며 만감을 느끼기만 하고 다가올 역사를 대비하지 못한다면 회한의 역사는 반복된다. 앞으로 도래할 개방형 학술지 시대에 편집장의 현명함 만으로는 밝은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 근거중심 치의학(Evidence-Based Dentistry)의 혜택을 바라는 치과계 모든 구성원들의 자각이 필요한 시점이다.

 

 

 : 김태일

서울대학교 치의학대학원/ 서울대학교치과병원 치주과 교수

하버드대학교 융합과학기술대학원 방문교수

하버드 한국학회(Harvard Korea Fellow Society) 회장

Journal of Periodontal & Implant Science 편집장

대한의학학술지편집인협의회 기획평가위원회/정보관리위원회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