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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창인의 밥집 이야기

국주와 국민주에 대하여- 송명섭 막걸리와 죽력고를 마시면서

[석창인의 밥집 이야기]- <79>


1.

막걸리 바람이 분지도 벌써 꽤 되었습니다.
한창 열기가 오를 땐, 저 혼자 속으로 이 바람도 조금 있으면 '불타는 조개구이'나 '안동 찜닭' 같은 신세처럼 금세 식을 걸로 예상했는데 여전히 거센 편입니다. (하지만 레드와인 열풍이 그랬듯, 막걸리 곡선도 정점을 지나 하향 추세인 것만은 분명하지요.)
막걸리는 한계를 가지고 있는 술입니다.
'국민의 술'은 될 수 있어도, 국주(國酒)가 되기엔 모자람이 많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배우 이승기가 국민 남동생은 되어도 국민배우가 되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죠.)

무엇이 문제일까요?
일단 제조가 너무 손쉽고, 재료가 흔히 구할 수 있는 것들이며, 최신식 제조시설이 아니어서 고부가 가치를 창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무리 유리병 용기에 담고, 캔에 담아도 소비자들은 일단 막걸리는 싼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있기 때문에 가격 저항을 하게 됩니다.
막걸리 제조공장(양조장)들도 그리 현대적이거나 최신식이 아닙니다. 쌀 창고에 쥐가 들락거리는 곳도 부지기수이고요. 게다가 술 자체가 맑지 않고 현탁액이며, 시간이 지나면 침전물이 가라앉기 때문에 정부 주도 의전에서 공식 만찬주로 부적격입니다. 이름에서부터 벌써 '막 걸은' 술이기 때문에 고급주로써 자격미달이며, 너도나도 아스파탐을 쏟아 붓는 통에 전통의 밋밋하고 텁텁한 맛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저희가 굳이 전라북도 정읍의 태인까지 찾아 간 것은 고집스레 '송명섭 막걸리'와 전통 가양주인 '죽력고'를 만드는 장인을 뵙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나라의 모든 막걸리는 아스파탐을 씁니다. (예전에는 사카린) 예전 막걸리의 나쁜 기억들은 숙취와 트림이었는데, 이는 '카바이드' 때문이었지요. 그러나 요즘 이런 방식으로 만드는 곳은 한 곳도 없으니 일단 다행이라면 다행이고요. 하지만 아스파탐이 문제입니다.
좀 핀트가 안맞는 얘기이지만, 고등학교 수학에서 필요, 충분조건 문제들은 당시에는 어찌어찌 해서 풀었지만 지금도 아리송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쁜 것이 아름다운 것의 전부는 아니지요. 하지만 아름다움의 조건 중에 예쁜 것이 분명 포함되어 있고 많은 비중을 차지하겠지만, 아름다운 여자가 다 예뻐야만 하는 것일까요? 결국 예쁜 여자가 아름다운 여자라는 등식은 참일까요? 마찬가지로 요즘 막걸리들은 다 답니다. 단 것은 맛있지요. 결국 맛있는 막걸리는 다 달아야 하는 것인가요?

여기에 홀로 고군분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국의 막걸리 제조장 중에서 드물게 아스파탐이나 당류를 넣지 않는 곳, 그곳은 태인의 송명섭 막걸리입니다. 예전에 한 모임에서 전국의 이름 난 막걸리를 모아놓고 강의를 들은 뒤, 비교시음을 한 적도 있었고, ‘보졸레누보 데이’와 같은 날에 전국 팔도의 햇막걸리 행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분명 송명섭 막걸리는 전통의 막걸리 맛을 가지고 있고, 건강에도 좋다는 것을 다 인정하면서도 그 자리의 많은 사람들은 달달한 막걸리만 마셔댔습니다.
그러니까 예쁜 여자보다는 아름다운 여자(마음씨 포함)를 좋아한다고 실컷 떠들어 대고서는 정작 데이트 신청은 예쁜 여자한테만 하는 꼴이 아니고 무엇인지요.   



2.

죽력고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다고 할 수 있는 '무가당 막걸리'의 주인공이신 송명섭 장인(명인, 무형문화재)께서 만드는 전통 증류주입니다.
각종 고서에는 죽력고가 조선의 3대 명주니 뭐니 하지만 저는 솔직히 세계 몇 대 불가사의니, 몇 대 자연경관이니 하는 표현 자체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데이터베이스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주관적이거나 혹은 인구에 회자되는 유명세에 덩달아 춤추는 일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병을 고친다고 알려진 술'  혹은 '건강에 좋은 술'처럼 두루뭉술하면서도 솔직 담백한 표현이 더 와 닿습니다.
어쨌거나 죽력고는 녹두장군 전봉준이 흠뻑 두들겨 맞고 사경을 헤맬 때 이 술을 마시고 기력을 회복했다는 전설이 있는데, 자연과학을 조금이라도 배운 사람이라면 술 몇 잔으로 병을 고쳤다는 말 자체에 회의를 품기 마련이지요. (전봉준은 그냥 나을 때가 되어서 나은 것 아닐까요?) 사실 주변에서 암 환자가 기존의 양방치료를 통해 항암제 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받았거나 받고 있으면서, 뭔 한약을 한 첩 달여 먹거나 어디 용한 안수목사의 기도나 무당의 굿으로 병이 나았다면 대체로 양방의 치료 효과보다는 한약과 목사님 혹은 무당의 ‘기도빨’ 때문이라고 둔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쨌거나 육당 최남선도 '조선문답'이라는 책에서 평양 감홍로, 전주의 이강주(혹은 이강고)와 더불어 호서지방의 죽력고가 조선의 3대 명주라 하였으니, 이름 없는 제가 그냥 그렇거니 해야지 별 수 있겠습니까.
다만 제가 평가하고 싶은 것은 어느 뜻있는 분이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가례의 술(가양주)을 재현했고, 이를 널리 알리려 혼자 고군분투 하는 것을 높이 사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죽력고를 만드는 제조법이 독특하여,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하려 한다는 얘기까지 듣고 보면, 송명섭 명인을 한낱 돈키호테적인 인물로 치부해버리기엔 무언가 아쉬운 부분이 있어서죠.
 
‘죽력’은 대나무 진액, 즉 엑기스를 말합니다. 송명섭 장인에 따르면 통상 3년생 대나무가 가장 효과적이라고 하네요. 이 죽력을 소주에 넣고 생강과 꿀 그리고 여러 한약재를 넣고 중탕 증류를 하여 얻는 술이 바로 죽력고입니다. 식약청에 의하면 이 죽력은 한약재이기 때문에 술로 판매를 할 수가 없다고 하여 그간 많은 실랑이가 있었지만 가까스로 허가를 받아 제조하게 되었다는 후문입니다.
처음 증류되어 나오는 술은 약 40도가 넘기에 나중에 나오는 놈들과 맞추어 삼십 몇 도로 맞춘다고 합니다. 이 술은 알콜돗수가 과히 높지 않아 원 샷을 해도 부담이 없지만, '약빨'이 나라고 천천히 음미하게 되지요.
다시 한 번 주장하건데, 우리의 국주(國酒)는 죽력고를 포함한 고급 가양주가 되어야 맞지, 막 걸은 막걸리는 국민주(國民酒)가 되어야 옳습니다.

  

    
집 안 마당 평상 위의 누룩들
 


 통상 양은그릇에 막걸리를 마시는 줄 알지만, 이렇게 사기 그릇에 마셔야 제 맛이 납니다. 하루에도 몇 팀씩 와서 구경도 하고, 명인의 강의도 들으니 이렇게 많은 막걸리 잔이 필요하겠지요.
 


 전통 명인을 홀대하고 지원에 박한 문화재청이나 언제나 규제의 그물로 괴롭히는 관의 나리들에 대해 엄청난 불만을 갖고 계시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지금의 위치를 이루어 내셨지요. 잘 익은 김치 한보시기, 잘 구운 고구마, 그리고 직접 만든 두부와 곰소 소금이 안주입니다.  
 


 명인은 막걸리를 '맛거리'로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음식 고서에도 백주, 탁주, 탁배기라는 말은 있어도 막걸리란 말은 '듣보잡'이라네요.
 


 마당엔 예전의 요강이 구근 화분으로 요긴하게 쓰였습니다. 좀 사시는 댁이나 도기로 된 요강이었지, 대다수 스텐리스이거나 놋쇠 요강이었던 기억이....
 


문화재청은 무형문화재로 지정만 해놓고 지원은 거의 없다는 것이 송명인의 하소연입니다.



죽력고를 만드는 원리를 열심히 도해를 그려가며 설명하는 그 열성을 보니 명인은 절대 돈키호테 같으신 분이 아니라는 확증이 듭니다.
 


죽력고의 '고'(膏)는 기름을 뜻하는 한자입니다. 그러니까 대나무 기름에서 추출했다는 말이지요.
 


장인의 고집이 가능했던 이유는 부창부수를 해주시는 사모님의 내조가 컸기 때문입니다.
 


정읍 피향정에서 바라본 하연지입니다. 무안의 백련지 만큼 장대하다거나 동경 우에노 연못의 그것보다 아기자기하지는 않지만, 정읍 하연지는 나름 매력을 갖고 있습니다.
여름의 화려한 연꽃들보다는 이렇게 쓸쓸한 겨울의 그것이 사람을 더욱 침잠하게 그리고 겸손하게 만드네요.




 

 

 

글: 석창인

에스엔유치과병원 대표원장

음식 칼럼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