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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창인의 밥집 이야기

소대가리냐 아니면 소머리냐... -곤지암 소머리국밥

[석창인의 밥집 이야기]- <55>

사전을 찾아봤더니, '대가리''동물의 머리'를 이르거나 '사람의 머리'를 속되게 이르는 말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소머리라는 말보다는 소대가리가 더 정확한 표현일 텐데, 소에 대한 고마움 내지는 '오마쥬'로 그러한 표현을 쓰지 않았나 싶군요. 그러나 돼지, , 오리, ... 할 것 없이 대가리와 머리를 혼용해서 쓰는걸 보면 조금 헷갈리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멸치' 말고는 대가리가 어울리는 동물이 거의 없는 건 아닌지요.

 

조금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나 해보겠습니다.

요즘의 수원 종로 네거리는 화성행궁과 종루 그리고 필요 이상으로 큰 광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거리 한 모퉁이엔 110년도 훨씬 넘은 교회와 바로 그 옆에 카톨릭 성지인 성당을 제외하면 어렸을 때부터 보아왔던 건물들이 거의 사라졌습니다. 그 광장 자리엔 원래 수원시외버스 터미널이 있었습니다. 터미널 옆엔 우체국이 있었지만 이젠 흔적도 없어졌고, 터미널 근처의 한 약국은 박카스와 활명수 그리고 이명래 고약 매출이 전국 제일이었다는 말까지 있었습니다. 당연히 많은 병의원들이 모여들었는데, 요즘 남아 있는 병원이라고는 겨우 한 두 개 정도입니다.

일본인들은 화성행궁을 없애고 그 자리엔 도립병원과 경찰서 그리고 신풍초등학교 교무실을 포함한 일부 교사를 만들었는데, 화성행궁 복원 사업을 하면서 경찰서, 병원 등은 다른 곳으로 이전을 시켰고 초등학교 이전도 논란 끝에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일본의 잔재를 없애는 그런 노력 와중에도 화성행궁의 정문인 신풍루 앞 기념 석물들엔 왜색이 완연한 것들도 있습니다. 정조의 성정이 다혈질이고 급했던 거는 인정하지만 왜 그리 서둘러 수원화성을 건설했는지는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게다가 후손들마저 화성 복원을 속전속결로 했어야만 했는지 역시 요령부득입니다.

용인이나 화성, 안성 등 수원 외곽으로 나가는 출발지였던 옛 수원시외버스 터미널의 화장실은 유료였음에도 언제나 북적였습니다. 요즘은 유료 화장실이 드물지만 예전에는 그런 화장실 하나 가지고 있으면 원래 부잣집이거나 주먹이라고 봤습니다. 사실 유료라 해봐야 기껏 몇 원이였겠지만 당시 서민들에겐 쉽사리 지출할 수 있는 돈이 아니어서 집에 도착할 때까지 참고 또 참았습니다. 게다가 일반 건물의 화장실 인심도 매우 박하던 시절이었지요. 가장 최근에 유료화장실을 가본 곳은 원주 중앙시장 상가의 일호집이라는 식당이었습니다. 소피가 급하여 주인에게 화장실을 물었더니 상가 통로에 작은 문을 열어 줍니다. 그곳엔 바께스하나가 있었고 뒤로는 장을 보러온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도저히 일을 볼 수가 없어서 다른 곳을 요구했더니 마지못해 도장이 찍힌 종이를 주면서 2층으로 올라가랍니다. 그곳 역시 귀신이 나올 법한 그런 화장실이었고요.

종로에 있던 수원 터미널 화장실의 주인 이름은 잊었지만, 그 분의 별명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바로 '소대가리'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소대구리'라고 발음을 했는데, 당시 수원에서 '피양 박치기 소대구리'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마도 김일의 박치기처럼 싸움의 끝을 박치기로 마무리하셨나 봅니다. 생존해 계신다면 아흔을 훌쩍 넘기셨을 겁니다. 이 분은 한국동란 중에 이북에서 내려온 주먹 출신이신데, 협객 시라소니와 비슷한 경우였겠지요. 대개 이북출신 주먹들은 김두한 같은 우파 정치깡패가 많았습니다. 이정재, 임화수 이런 사람들은 경기도 이천, 여주 쪽 출신으로 서울의 동대문과 광장시장을 접수하면서 거물이 된 조폭이라더군요.

이런 저런 인연으로 저는 소머리국밥을 먹을 때면, '피양 박치기 소대구리 할아버지'가 떠오릅니다.

또 하나 떠오르는 분은 현 화성박물관 자리 천변에 테이블 두 개만 놓고 소머리국밥을 팔던 할머니입니다. 단골 할아버지들만 오시는 정말 맛있는 곳이었는데 박물관의 건립과 함께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옛 것을 지키자고 만든 박물관 때문에 정작 지켜야 할 할머니 손맛을 잃고 말았던 게지요. 시청에서의 배려가 아쉬운 부분이지요.

곤지암이 소머리국밥으로 유명해진 것은 그리 오래지 않습니다. 1981년에 최미자 할머니가 곤지암을 소머리국밥의 본향처럼 만들었고 코미디언 배연정까지 가세하면서, 곤지암 하면 골프 1번지소머리국밥'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그 옛날 영남지방에서 과거를 보러 올라가거나 한양에 볼 일을 보러 갈 때면, 죽령과 새재 그리고 박달재를 넘어 올라오다 곤지암을 거쳐 한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 길목이니 당연히 주막이 있었을 터이고, 그곳에서는 국밥과 술을 팔았겠지요. 그렇다고 그런 역사를 지금의 소머리국밥과 연관시켜 설명한다는 것은 좀 견강부회는 아닐까요? 반면. 호남이나 충청도 쪽에서 한양을 갈 때는 삼남길을 따라 올라오다 수원 바로 밑인 병점(떡전)에서 떡을 사먹고는 하루 쉬었다가 일부는 과천 쪽으로 일부는 안양 시흥 쪽으로 해서 도성을 들어갔다고 합니다.

곤지암 국밥집은 집에서 차로 40여 분 거리입니다. 남들은 국밥 하나 먹으러 그 먼 길을 가느냐고 하지만 식도락가에겐 참으로 즐거운 드라이브 길이 아닐 수 없지요.

1981년에 오픈했다는 최미자 소머리국밥입니다. 들어가니 번호가 적힌 나무 주걱을 하나 주는데 대기 번호가 30번이나 되네요.

겨울엔 스키 타러 온 가족 단위가 많습니다.

밥을 아예 말아서 나오는 토렴식인데, 국물이 맑고 산뜻합니다. 나주 곰탕 스타일과 비슷합니다.

고기를 하나 건져 장에 찍어 먹으면 먼 길 달려온 게 위로가 됩니다.

깔끔하게 한 그릇 비웠습니다.

곤지암의 또 다른 유명한 소머리국밥집인 골목집의 수육입니다

이 정도 비주얼이면 안주가 소주를 부른다고 봐야죠.

골목집의 국밥은 토렴식이 아니라 따로국밥 스타일입니다. , 국 따로 밥 따로 나옵니다.

보통이 아닌 특인데, 건더기도 많고 그릇도 조금 다르네요.

 



글: 석창인

에스엔유치과병원 대표원장

음식 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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