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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창인의 밥집 이야기

어란과 가라쓰미

[석창인의 밥집 이야기]- <47>

 

조선시대 때부터 임금님 진상품이었다는 어란의 역사가 더 오래일까 아니면 도쿠가와 막부 이후 쇼군 진상품이었다는 일본의 가라쓰미가 더 원조일까 하는 문제는 음식문화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겐 꽤 흥미로운 주제입니다.

어란과 가라쓰미에 필적할 만한 이탈리아의 '보타르가'는 외양과 만드는 방법이 비슷하긴 하지만 급수에 있어서 견줄 바가 아니어서 일단 논외로 하겠습니다. 보타르가는 참치알이나 숭어알로 만들기는 하지만 워낙 염장을 심하게 해서 짠맛이 모든 것을 덮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제 나름의 생각은 가라쓰미가 더 원형에 가깝고 이를 들여온 우리나라에서 고소한 맛을 더하기 위하여 참기름을 바르지 않았을까 추정을 해봅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영암의 김광자 할머니가 만드는 어란이 거의 유일하다고 알려져 있지만(실제 여러 곳에서 만들기는 합니다), 일본에서는 가라쓰미의 고향인 나가사키 지역뿐만 아니라 일본 전역에서 만들어지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음식 문화에서도 민족주의가 발휘되어 우리나라에서는 일본과 별도로 만들었다고 주장하면 할 말은 없습니다만)

제 아이가 코흘리개 시절, 우는 아들을 카시트에 동여매고 전국을 돌아다닌 적이 많았습니다. 당시에 들렀던 전라도 영암 버스터미널 근처의 김광자 할머니 댁은 겉보기에도 많이 낡았으며 집이 도로와 붙어있어서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아랫목만 따끈했던 방이었습니다. (당시 할머니 연세가 70을 조금 넘으셨으니 지금은 90세 전후일 겁니다.) 할머니가 멀리서 왔다고 맛보기로 조금 썰어주시기도 하셨지만, 제대로 만들어진 놈 한 쌍과 만들다 실패해서 반푼이가 된 한 쌍을 샀던 기억입니다.

옛날 양반들은 어란을 먹을 때 식칼을 불에 달구어 최대한 얇게 썬 뒤에 앞니 사이에 끼어 술 한 잔에 한 번씩 핥아서 먹었다고도 하는군요. 요즘 어느 고급식당에 갔더니 어란을 깍두기처럼 썰어서 내놓던데 황송하면서도 한편으론 아깝다는 생각이 듭디다.

일본의 가라쓰미는 동경의 웬만한 전통식당에 가면 다 팔 정도로 대중적입니다. 대신 크기가 우리 것에 비해서 상당히 작지요. 우리나라에서 팔리는 사이즈면 대체로 수십만 원입니다. 나가사키 국제공항 면세점에서 파는 가라쓰미는 백만 원이 넘는 것도 있습니다.

 

여기서 일본에서 3대 진미의 하나로 꼽히는 가라쓰미만 언급하면 나머지 두 개가 섭섭할 지도 몰라서 같이 말씀드리지요.

세계 3대 진미는 프와그라, 트러플(송로버섯) 그리고 캐비어입니다. 그런데 일본의 3대 진미는 히젠 지역의 숭어알젓(가라쓰미), 미카와의 해삼창자젓(고노와다) 그리고 에치젠 지역의 성게알젓(우니)입니다. 히젠 지역의 가라쓰미가 유명하긴 하지만 첫출발은 나가사키라고 보시면 됩니다. 독특한 것은 해삼창자젓인 고노와다와 더불어 해삼 난소젓인 '쿠치코' 혹은 '코노코'라 불리는 것이 있는데 이게 훨씬 더 귀하고 비싸며 맛있다고 하네요.

그런데 왜 가라쓰미라는 이름이 붙었을까요? 가라쓰는 큐슈의 사가 지역에 있는 항구 이름입니다. 이곳에 그 유명한 나고야(名護屋)성이 있었지요. 신일본제철이나 도요다 본사가 있는 일본 중부 지역의 나고야(名古屋)와는 한문으로 한끝 차이입니다만 발음은 같습니다. 최근 '명량'이라는 영화가 대박을 쳤지만, 임진왜란을 일으키기 바로 직전에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의 다이묘와 군인들을 모아 조선 출병을 시작한 곳이 바로 가라쓰의 나고야성입니다. (명량해전은 임진왜란이 아니고 정유재란 때입니다.) 그런데 가라쓰라는 지명은 한자로 당진(唐津)이라고 씁니다. 결국 일본이 당나라와 문물을 교류할 때 중국과의 최단 거리인 항구였던 것입니다. 우리나라 충남의 당진도 그 영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일본의 도자기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도공들이 가서 큰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지만, 당나라 도자기의 영향도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하여, '가라쓰야키'라는 도자기 브랜드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지요. 어쨌거나 전국을 평정한 토요토미가 나가사키를 방문했을 때, 그 동네 영주가 숭어알젓을 상납하였는데 이 희한한 맛을 내는 놈의 이름이 뭐냐고 물었답니다. 그러나 당시까지도 이름이 없던 터라 고민을 하다가 결국 당나라에서 만든 먹과 비슷하여 그 먹 이름인 '가라쓰미'(당나라 먹)라고 둘러댔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도루묵 사연과 비슷한 전설 따라 삼천리가 아닐 수 없지요.

제게 줘봐야 별 효과도 보지 못하겠지만, 두어 해 전 명절에 누가 어란 선물을 했지 뭡니까? 그것도 김광자 할머니의 어란으로 말입니다. 이를 냉동실에 넣어두고 차일피일 하다가 그만 까먹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문득 기억에서 사라진 어란이 떠올랐던 것이죠. 냉동실을 뒤져보니 아직 쌩쌩 합니다.

그러나 와인도 그렇고, 귀한 음식도 그렇지만 그 값어치를 알지 못하는 사람과 같이 먹는다는 것은 '돼지 목의 진주목걸이'와 하등 다를 바가 없겠지요. 일단 먹으려면 같이 자리 할 친구들에게 음식교육부터 시킬 일입니다.

일설에 따르면 어란에는 교동법주가 최고로 어울린다고 친구들에 귀띔을 해줬습니다. 그 술을 사갖고 오라는 일종의 협박이죠.

 

냉동실 구석에 고이 보존된 어란입니다. 마치 왕가의 계곡에 숨어 있던 투탄카몬의 유물처럼 완벽합니다.

음식교육의 효과는 확실히 있더군요. 동기 친구가 택배로 교동법주를 주문해서 가져왔습니다.

 

야외에서 식사를 할 예정이라 어란용 도마와 칼을 준비하기가 좀 고민스럽습니다. 결국 치과기공용 메쓰홀더에 블레이드 새 것을 끼고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어란이 자꾸 예쁘게 잘라지지 않고 뭉게집니다. 결국 식당 주방에 부탁하여 식칼을 가져와 자르니 한결 낫습니다.

  

타이베이의 최고급 스시집을 갔더니 어란을 깍뚝썰기로 내옵니다.

 

매번 얇게 자른 어란만 먹다가 통크게 먹는 호사도 누려봐야죠.

어럽쇼? 이건 완전히 어란전이군요. 숭어알로 만든 어란이 아니고 민어알로 만든 것입니다.

 


글: 석창인

에스엔유치과병원 대표원장

음식 칼럼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