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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창인의 밥집 이야기

나의 소울 푸드는 냉면 - 동두천 평남면옥

[석창인의 밥집 이야기]- <29>

 

 

일본의 여류 감독 오기가미 나오코가 만든 영화 '카모메 식당'을 보면, 오니기리(일본식 주먹밥)가 등장하고 조연 격으로는 루왁 커피가 나온다. 그 후속인 '안경'이라는 작품에는 우메보시나 팥빙수가 하나의 상징으로 출연하며, '토일렛'이라는 작품에서는 스시가 등장한다.

감독이 그 음식들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이야기들은 현대인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소외감이나 가슴 속의 상처 등을 치유하기 위한 치료제, '소울 푸드'의 필요성과 그 역할을 말하고자 함이다.

그렇다면 자신만의 소울 푸드나 우리나라 중장년층들이 생각하는 대표적 소울 푸드로는 무엇이 있을까?

사람마다 개인적 경험이 다르고, 살아오면서 입은 내면의 상처 또한 누구나 다르기에 그들이 선택하는 소울 푸드는 무척 다양하겠지만, 굳이 나만의 그것을 꼽으라면 단연코 '냉면'이 아닐까 한다.

 

함흥식 비빔()냉면은 까다롭고 쪼잔한 성격 때문에 오로지 두어 곳의 식당만 다니기에 논외로 치고, 평양식 물냉면만큼은 집집마다 고유한 포스 혹은 아우라가 있기 때문에 그 먼 길을 마다않고 기꺼이 방문을 하는 것이다.

(어느 분야이든 초심자들이 항상 그렇지만) 냉면의 밍밍한 맛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마니아로 변해 갈 무렵, 전국을 주유하며 천하의 냉면을 다 섭렵하려는 호기를 부리기도 하였고 , 동행한 사람들 앞에서 냉면 맛의 우열을 논하는 것이 커다란 감투라도 되는 양 우쭐하기도 하였다. 그러다보니 물냉면 전용 나무젓가락을 품고 다니기도 하였고, 육수 감별이나 메밀 함량 따위에 괜한 흥분을 하는 등의 치기를 부리곤 하였다.

그러나 뼈대 있는 집일수록 제사를 치르는 진설법이 가가례(家家禮), 다시 말해서 집집마다 다른 것처럼, 어느 정도 알려진 냉면 명가라면 마니아들의 호불호에 휘둘리고 연연해하는 것 보다는 그 집 고유의 맛을 올곧게 지키는 것이 정도(正道)라는 생각까지 드는 걸 보니, 나 스스로 이젠 완숙기에 접어든 냉면 마니아가 된 건 아닌지...

선무당 사람 잡고, 초보 인턴 응급실 휘젓듯, 혈기 방장하던 한 때는 메밀 함량이 전분에 비하여 지나치게 낮아 입술로 쉽게 끊어지지 않거나, 육수의 동치미 국물과 고기 국물 비율이 엉망인 경우 혹은 잡맛이나 인공감미료 맛이 심하게 느껴지기라도 하면 천릿길 마다 않고 달려온 그 억울함에 분통이 터지기도 했다.

 

하지만 세월은 각진 모서리를 둥글게 만드는 법! 언필칭 미식가의 까다로움 따위도 세월 앞엔 무뎌지게 마련이어서 요즘은 어떤 냉면이라도 그것을 만들어 내는 '공력'만 충분히 느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을지로에 포진한 유수한 냉면 명가들과 벽제갈비집(봉피양 포함)의 냉면, 청담동 그릴 H의 물냉면, 의정부의 평양면옥, 수원의 대원옥, 안성의 우정집, 분당의 능라, 평가옥과 평양면옥, 양평의 옥천냉면, 대전의 숯골 원냉면, 경북 풍기의 서부식당, 진주의 해물냉면과 경주의 평양냉면 등은 나만의 냉면집 리스트들이다.

여기에 더하여, 근자에 새롭게 열애에 빠진 냉면집이 또 하나 생겼음을 고백한다.

마음이 허할 때, 구수한 메밀 향과 황금비율에 가까운 동치미 국물과 육수의 유혹을 이겨내기란 참으로 고통스러울 정도인데, 주말만 되면 열 일 제쳐두고 동두천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뿐인 것이다.

동두천에는 떡갈비로 유명한 식당도 있지만 냉면 명가인 평남면옥이 있다.(031-865-2413)

나는 이 식당의 실내 분위기에서 언뜻 '카모메 식당'을 느꼈다. 소란스럽지 않고 단출한 데다, 실내도 시골 냉면집 같지 않게 깔끔하여 냉면과의 은밀한 연애를 충분히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냉면집마다 빠짐없이 내놓는 수육이나 편육은 식당에 따라 맛의 편차가 매우 크지만, 이 집의 돼지고기 편육만큼은 '백점 만점'임을 보증한다.

 직장 때문에, 가족 때문에 혹은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총 맞은 것처럼' 가슴에 구멍이 났다면, 특히나 요즘처럼 말도 안 되는 재난사고에 깊은 슬픔에 빠졌다면 나는 그 상처 속으로 시원한 냉면을 넣어보라고 권유한다. 만약 그 상처가 어느 정도라도 치유된 것 같다면, 아마도 당신의 '소울 푸드'는 냉면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냉면 맛있게 먹으려고 의도적 자해를 해서는 곤란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