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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묵 칼럼

“치료는 환자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최상묵의 NON TROPPO]-<16>


요즘 병원에서 의사와 환자간의 대화가 별로 필요치 않다고 되어 있다. 의사들은 병력을 청취하는 과정에서 미리 짜여 진 형식에 따라 ‘예’, ‘아니오’ 단답식 답변을 유도하는 질문을 하는데 반해, 환자들은 언제나 긴 ‘이야기’로 대답하고 싶어 한다.

 

의사가 질병을 진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병을 앓은 사람에 대해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을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이해해야 한다. 의사는 환자의 이야기에서 환자의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환자가 의사의 질문에 대답할 때 언어를 사용한다. 환자가 사용하는 언어 스타일, 단어의 선택, 전개하는 논리 등으로 환자의 신념과 태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언어를 통해서 말하는 사람이 수다스러운 사람인지 과묵한 사람인지도 알 수 있다.

 

절제된 언어를 많이 사용하면 그 통증은 환자가 말하는 이상의 경우가 많고, ‘끔찍이, 매우, 지독히’ 등의 단어를 많이 사용하는 사람이면, 대체로 그 환자의 통증은 표현보다 심하지 않은 증세라고 판단할 수 있다. 환자가 증상을 설명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단어를 통해 그 설명하는 질병의 상태에 대해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사람의 인간성에 대해서도 알 수 있게 된다. 말하는 속도, 음성의 높이, 목소리의 강도 등을 통해서 그 사람의 감성을 느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인가를 알기 위해선 그 사람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또 듣고 해야 한다. 사람에 대한 의사의 지식은 검사나 측정을 통해서 얻어진 객관적 지식도 중요하지만 환자의 인간성에 대한 그 사람 됨됨이에 대한 주관적 지식도 진료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우리 문화에서는 환자에 대한 병력을 청취하면서 환자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된다는 사실을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처럼 느낄 수도 있고, 자신의 사생활이 노출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불쾌함을 줄 수도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환자들은 육체적 비밀이 노출되는 것은 참을 수 있지만 자신의 인간적인 삶에 누군가 침투하는 것은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의사의 진찰실에서 옷을 벗는 일이나 입을 크게 벌리는 일에는 익숙해 있지만, 병력을 청취하는 과정에서 사생활을 노출하는 일에는 그리 탐탁히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인간을 이해하는 것은 질병을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질병은 그 상태를 개념화 할 수도 있지만 인간은 개념화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환자들의 인간성에 대한 고려로 인해 임상의학이 더욱 복잡해졌을 뿐만 아니라 과학적 의학의 정밀성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불평하는 현대의학자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질병 자체에 대한 지식은 가지고 있으나 질병에 걸린 인간에 대한 지식이 결여되어 있어 의료의 황폐화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환자와의 관계에서 얻어진 정보 중에서도 의사들은 극히 일부만 취하고 나머지 부분은 무시해 버린다. 환자들의 질병만이 의사의 관심사이고 환자의 인간성은 질병에 대한 이해를 방해하는 요소로 생각해 버리는 경우도 있다. 미셀 푸코는 “보통 사람들이 바라볼 수 없는 표면 밑의 질병을 바라보는 의사의 능력이 바로 의사의 권력”이라고 말했다. 이 ‘표면 밑의 질병’을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은 육체만을 열어 봄으로써 전부 보았다고는 할 수 없다. 현대의학 기술의 성과들은 물리학과 공학의 발전에 힘입어 육체의 문을 활짝 열었다는 점에서는 큰 성과이지만, 의학의 중심과제는 역시 인간 생물학, 즉 인간을 재발견하는 일이다. 질병의 원천을 인간 속에서 발견하고 그 지식으로부터 질병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인간 내면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마주보면서 나누는 대화의 필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은 대화를 통하지 않고서는 생각해 볼 수 없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더불어 살게 마련이므로 인간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대화를 상실할 때 비인간화되어진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대화의 상실에 있다. 의료분야에 있어 대화상실로 비인간화 되어가는 현상은 현대의학이 풀어야 할 숙제이다.


글: 최상묵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덴틴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