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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창인의 밥집 이야기

해장국은 사내들의 고달픈 삶 -청진옥에서

[석창인의 밥집 이야기]- <12>

 

해장국의 종류는 상당히 많습니다. 우리가 익히 먹어보았던 기본적인 몇 가지 해장국에 더하여, 집집마다 어머니가 남편과 장성한 아들을 위해 뚝딱 만들어내는 '창작적인 해장국'까지 합친다면 그 가짓수는 그야말로 무량지수일 겁니다. 북어해장국, 콩나물해장국, 선지해장국, 순대해장국, 황태해장국, 다슬기해장국, 재첩해장국, 돼지국밥.... 여기에 주재료를 두어 개 이상을 조합하여 퓨전 해장국까지 만들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순전히 제 생각이지만 아무래도 해장국의 대표선수는 선지해장국이 아닐까 싶네요. 옛날에는 가장 싸게 구할 수 있었던 것이 '동물의 피'였을 것이고, 다수 국민들이 영양실조 상태였던 전후(戰後) 몇 십 년 동안은 아마도 선지가 최고의 영양보충식이었을 겁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 살았던 수원시 세류동에는 어스름한 저녁이 되면 일주일에 한 두 번꼴로 선지장수가 "선지요! 선지가 왔어요~~!!"하고 큰소리로 외치며 지나갔습니다. 짐 자전거 양 쪽에 양철로 만든 쇼트닝 통 비슷한 것을 서너 개 씩 매달고 다니셨죠. 아이들은 엄마 심부름으로 몇 백 원과 큰 사발이나 바가지를 들고 나가면 아저씨가 선지를 퍼 담아주셨는데 저희들은 그게 진짜 '피고기'인 줄로만 알았다지요?

해장이라는 말은 원래 술에 지친 장을 푼다는 해장(解腸)이 아니라 해정(解酲)에서 나왔습니다. 여기서 정(酲)은 술이 아직 덜 깬 숙취 상태를 이르는 한자어죠. 그러니까 원래 '해정국'이 옳은 말입니다.

농담입니다만, 저희가 환자 진료를 거부할 수 있는 조건 중에 하나가 의료인이 명정 상태일 때입니다. 여기서 명정(酩酊)은 술이 몹시 취하여 몸을 가눌 수 없는 상태인데 해정의 정(酲)과는 한자가 다르죠. 그런데 아주 보기 싫은 환자나 술에 취한 환자가 와서 억지를 부리면 원장실 냉장고에 숨겨둔 소주를 가운과 머리에 좀 뿌리고 내가 술에 취하여 진료를 못해주겠다고 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도 가끔 해봅니다.

 

해장국은 주로 오전 일찍 먹는 음식입니다. 전날 과음을 했거나, 밤샘 근무를 하는 직업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예전 대학생들이 통금이 풀리는 새벽4시까지 '고고장'에 갇혀 있다가 새벽 먼동이 어스름 밝아 올 때 후다닥 달려가 먹는 음식입니다.

요즘도 아침 일찍 청담동 '새벽집'에 가보면 인근 클럽에서 밤새 '부비부비'하던 부잣집 자식들로 때 아닌 러시아워까지 생깁니다. 비싼 외제차를 '기스'나지 않게 발레파킹하느라 주차장도 무척 혼잡스럽고요.

그러나 종로의 '청진옥'은 강남 '새벽집'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릅니다. 종로서에서 밤샘 근무하며 취객들과 실랑이를 벌여야 했던 경찰관 아저씨부터 새벽일 나가는 막일 노동자들, 새벽잠이 없는 서울 토박이 할아버지들, 교통지옥을 피해 아침 일찍 출근하는 직장인들.... 이 분들이 바로 청진옥의 핵심 구성원들입니다.

삶 자체가 버거운 사람들이 먹어야 하는 해장국과 한여름 '버켄스탁 쑤레빠' 질질 끌고 반바지 차림으로 먹는 해장국과는 국물의 농도가 다릅니다. 같은 '핏국물'이라도 하나는 사내들의 땀과 눈물이 가미된 해장국이고 또 하나는 부모 등골을 우려낸 해장국이니 그 맛이 다른 것은 당연하겠지요.

    

      선지해장국

                                               신달자

한 사내가 근질근질한 등을 숙이고 걸어갑니다

새벽까지 마신 소주가 아직 온몸에 절망을 풍기는

저 사내

욕을 퍼마시고 세상의 원망을 퍼마시고

마누라와 자식까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퍼마시다가

누구를 향해 화를 내는지 두리번거리다 다시 한잔

드디어 자신의 꿈도 씹지도 못한 채 꿀꺽 넘겨버린

저 사내

으슥으슥 얼음이 박힌 바람이 몰아치는 청진동 길을

쿨럭쿨럭 기침을 하며 걸어가다가

바람처럼 '선지해장국' 집으로 빨려들어갑니다

야릇한 미소를 문지르며 진한 희망 냄새 나는

뜨거운 해장국 한 그릇을 받아 드는데

소의 피, 선지 한 숟가락을 물컹하게 입 안으로

우거지 한 숟가락을 들판같이 벌린 입 안으로

속풀이 해장국을 한 번에 후루룩 꿀꺽 마셔버리는데

그 사내 얼굴빛 한번 시원하게 붉으레합니다

구겨진 가난도 깡소주의 뒤틀림도 다 사라지고

속터지는 외로움도 잠시 풀리는데

아이구 그 선짓국 한 그릇 참 극락 밥이네

어디서 술로 밤을 지샌 것일까 구석진 자리

울음 꽉 깨무는 한 여자도

마지막 국물을 목을 뒤로 젖힌 채 마시다가

마른 눈물을 다시 한 번 문지르는데

쓰린 가슴에 곪은 사연들이 술술 사라지는데

여자는 빈 해장국 오지그릇을

부처인듯 두 손 모으고 해장국 수행 끝을

희디흰 미소로 마무리를 하는데.....

 

 

 

 

 76년이나 된 노포입니다.

  예전 청진옥 바로 앞에는 500원 내고 휘두르는 실내 야구장이 있었지요. 다들 술에 취해 방망이를 휘두 르니 공이 맞을 까닭이 있을까요? 그 헛방질의 분노가 해장국 먹으면서 가중되더니 기어코 소주 한 병을 시키고야 맙니다.

 

    

 반찬은 오로지 곰삭은 깍두기 하나입니다.

 

   

송송 썬 파도 넉넉합니다.

 

 

     

 속을 헤집어 보니 선지와 내장이 한가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