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2019년 서울에서개최될ISDH(International Symposium on Dental Hygiene)홍보를 위해80여명의한국대표단이 지난22일제20차 대회가 열리는스위스 바젤로 떠났습니다. '이쁜황'(한양여대 황윤숙 교수)도 이 대표단의 일원입니다. 그는출발에 앞서대회현장을독자들과 직접연결하기로 약속 했습니다. 행사기간 중 생생한 현장풍경을 사진 위주로 덴틴에전달 하기로 한 것이죠.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군요.아시다시피, '이쁜황'은 한다면 하는 분이니까요.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화이팅~!편집자 주■ 도착나는 중학교 1학년때 부산에서 서울로 전학을 왔다. 경부고속도로가 처음 개통되어 한진, 그레이하운드 등 고속버스가 생겨났고 터미널은 서울역 건너 염천교 인근에 자리 잡았다. 지금 치과재료업체가 밀집한 곳 말이다.당시 6살이던 동생이 가끔 서울로 우리를 만나러 왔고 6시간 이상의 버스는 아이에게는 수면으로 이어지는 지루한 길이었을 것이다. 그런 꼬마가 계속 잠에 취해있다. 제3한강교에서 눈을 떠 서울 시내까지 버스를 타고 난뒤 처음 한 말이 "에고 서울이 멀기도 멀다"였다. 지금까지 계속 잤으면서 말이다.그런데 인천공항에서 프랑크푸르트암마인 공항까지
오는 2019년 서울에서개최될 ISDH(International Symposium on Dental Hygiene) 홍보를 위해80여명의 한국 대표단이 지난 22일 제20차 대회가 열리는 스위스 바젤로 떠났습니다. '이쁜황'(한양여대 황윤숙 교수)도 이 대표단의 일원입니다. 그는출발에 앞서 대회 현장을 독자들과 직접 연결하기로 약속 했습니다. 행사기간 중 생생한 현장풍경을 사진 위주로 덴틴에 전달 하기로 한 것이죠.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군요. 아시다시피, '이쁜황'은 한다면 하는 분이니까요.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화이팅~! 편집자 주■ 출발'그러면 그렇지 내가 여유 있게 준비하고 떠나긴 어렵지..' 새벽 5시 기상. 귀국 후 참여해야 하는 보수교육 초록을 작성해 보내고 어제, 아니 새벽까지 꾸리다가팽개쳐 둔뚜껑열린 여행가방과 다시 씨름을 하다하다 지쳐 '그래 결심 했어, 여권과 통장 두 가지로' 했지만, 가방을 체중계에 올려 보니 무게가 '에그머니나'다. 여유 있게 출발하려고 서둘렀는데 시간은 자꾸 가고, 이젠 됐지 싶어 가방을 닫고 돌아서면 아직 양말보따리는 가방 속에 입장도 못한 채다. 나름 인터넷에서 여행가방 싸기도 찾아보고 했건만 나아진 게 없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아 조선의 치과계는 환희 속에서 당면 문제에 대응하느라 분주했습니다. 치과계 최초의 종합지로 1946년 5월 1일에 발간된 『朝鮮齒界』 창간호에는 당시 치과계 구성원들이 어떤 생각을 하였고 무엇을 위해 노력했는지 생생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 내용을 연재하면서 70년 전 선배들과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당시의 맞춤법이 지금과 적잖이 다르지만 원문 그대로 두었습니다. 정리: 조영수■ 집회와 소식 1. 조선치과의사회 진용위원장 안종서부위원장 문기옥서무위원 안병식 기획위원 이유경 방안자보건위원 학술위원 김문조 정보라 자재위원 조명호 문기옥조사위원 정도성 박영준 재무위원 박부영 박동상 평의원 박명진 조호연 박용덕 정용국 원재신 이양숙 홍사근 최의종 조기항 이형주2. 경기도치과의사회 위원 부서 결정3월 10일 결성된 경기도치과의사회 제1회 위원회를 3월 11일 상오 11시 치전회의실에거 개최, 위원 부서를 아래와 같이 결정하고 하오 1시 산회.위원장 문기옥부위원장 총무부위원 안병직 부위원장 이창용총무부위원 이유경 서병서 조명호 이성민 이희창보건부위원 박명진 정보라‘재무부위원 김연권 박영균3. 경기도치과의사회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아 조선의 치과계는 환희 속에서 당면 문제에 대응하느라 분주했습니다. 치과계 최초의 종합지로 1946년 5월 1일에 발간된 『朝鮮齒界』 창간호에는 당시 치과계 구성원들이 어떤 생각을 하였고 무엇을 위해 노력했는지 생생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 내용을 연재하면서 70년 전 선배들과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당시의 맞춤법이 지금과 적잖이 다르지만 원문 그대로 두었습니다. 정리: 조영수경기도치과의사회 창립총회는 46년 3월 10일 하오 2시부터 치전 회의실에서 동회 창립준비위원 及 한성, 개성, 수원 각 지부 대의원 20여명, 내빈으로 조선치과의료상공조합 위원장 차문식, 동 총무위원 김문기 양씨, 본사측 최, 이, 황 3씨 차씨 참석하야, - 개회선언 - 국기 경배 - 애국가 봉창 - 개회사(경과보고) - 내빈 축사 - 의장 선정 - 회칙 초안 검토 - 임원선거 - 기타사항 - 폐회의 순서로 성대히 개최, 기념촬영을 하고 동 6시 30분 폐회 후 아서원에서 간친연을 베풀었다. 선출된 동회 임원은 ▲위원장 문기옥 ▲부위원장 안병식, (수원)이창용 위원 ▲박명진, 정보라, 조명호, 이유경, 이성민, 김연권,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아 조선의 치과계는 환희 속에서 당면 문제에 대응하느라 분주했습니다. 치과계 최초의 종합지로 1946년 5월 1일에 발간된 『朝鮮齒界』 창간호에는 당시 치과계 구성원들이 어떤 생각을 하였고 무엇을 위해 노력했는지 생생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 내용을 연재하면서 70년 전 선배들과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당시의 맞춤법이 지금과 적잖이 다르지만 원문 그대로 두었습니다. 정리: 조영수■ 新치과의학 건설을 위한 투쟁(上)建國途上의 一學徒로서 생각나는대로 소감을 말하겠다.해방 후 조선학도대의 일원으로 치안유지에 협력하고 있다가 정권 수립이 容易히 완성되지 않음을 알고 學隊는 학원으로 도라왔다. 우리는 우리의 요구와 임무를 규정하야 다음과 같이 학생회 강령을 가결하였다.(1) 우리는 제국주의적 잔재를 일소하고 진정한 민주주의국가 건설에 협력함.(2) 우리는 학문의 자유와 학원의 자치를 확보함.(3) 우리는 조선의 전국민 특히 노동대중을 위한 新치과의학 건설에 邁進함.즉 지금까지 우리가 받아온 교육에 대한 반성 及 그 보충으로 임무수행의 출발점을 정했다.우리는 제국주의의 모순과 현 정세에 대한 그 경제제도를 바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아 조선의 치과계는 환희 속에서 당면 문제에 대응하느라 분주했습니다. 치과계 최초의 종합지로 1946년 5월 1일에 발간된 『朝鮮齒界』 창간호에는 당시 치과계 구성원들이 어떤 생각을 하였고 무엇을 위해 노력했는지 생생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 내용을 연재하면서 70년 전 선배들과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당시의 맞춤법이 지금과 적잖이 다르지만 원문 그대로 두었습니다. 정리: 조영수■ 치과의무행정에 대한 소감 조선이 해방된 이후 전민족은 경천동지의 환희를 느끼는 동시에 전승연합국에 滿腔의 감사를 표시하였다. 우리는 이 감격으로 출발하여 각계각층을 막론하고 協心戮力, 신조선 건설을 위하여 노력하여 오든 중 민족해방과 국가건설에의 千載一遇인 호기를 의식치 못하여 사리사욕에 충만한 모리배와 악덕 奸商人의 암약으로서 물가는 점차 폭등하여 가고 經濟攪亂과 사회 무질서를 야기케 함은 실로 遺憾한 現狀이며 과도기의 健民운동도 막대한 방해를 받고 있음은 사실이다.따라서 의무계로서의 중요한 일부문인 치과의료기계 及 재료도 악덕 간상배들로서 말미암아 무자격 의료업자들에게로 輾轉 賣買되어 치과의료계에 일대 충격을 이르키고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아 조선의 치과계는 환희 속에서 당면 문제에 대응하느라 분주했습니다. 치과계 최초의 종합지로 1946년 5월 1일에 발간된 『朝鮮齒界』 창간호에는 당시 치과계 구성원들이 어떤 생각을 하였고 무엇을 위해 노력했는지 생생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 내용을 연재하면서 70년 전 선배들과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당시의 맞춤법이 지금과 적잖이 다르지만 원문 그대로 두었습니다. 정리: 조영수■ 치아근관치료의 역사적 고찰 치아신경치료 및 발치술은 상고시대로부터 있었던 모양이다. 其後 1세기에 이르러는 치수실을 開口하는 방법과 또한 치수질환을 치료할 목적으로 발수하는 법까지 있었다 한다. 그러케 치수를 죽이고 근관을 치료하는 방법이 있었기는 하나 18세기 초까지도 보통 개업에는 하지 못하였엇다.Fauchard에 제1회 출판에도 근관치료에 관하여난 별로 발표가 없었고 1746년 Fauchard 제2회 출판에야 비로서 측절치 及 尖齒에 치수실을 노출식히는 방법과 치수를 죽이는 방법이며 핀이나 鐵絲를 가지고 신경을 빼낸 후에는 棉花에다가 「Cinnamon」 柚나 丁香油를 묻혀가지고 消毒하는 방법을 기록하였섯다. 然이나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아 조선의 치과계는 환희 속에서 당면 문제에 대응하느라 분주했습니다. 치과계 최초의 종합지로 1946년 5월 1일에 발간된 『朝鮮齒界』 창간호에는 당시 치과계 구성원들이 어떤 생각을 하였고 무엇을 위해 노력했는지 생생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 내용을 연재하면서 70년 전 선배들과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당시의 맞춤법이 지금과 적잖이 다르지만 원문 그대로 두었습니다. 정리: 조영수■ 조선치과상공계에 대하여조선치과상공계의 과거와 현재 又는 장래를 약술함으로써 건설기에 있는 斯界에 참고가 된다면 幸이 될가한다. 해방 후 국내에는 치과재료상이 우후죽순격으로 많이 생겼으니 그 원인은 舊 치과 재료상, 조합 사무원, 日人치과상점에 근무하든 점원, 만주에서 치과 재료상을 하든 귀환인, 기업 정비로 폐업 중에 있는 자 등이 개업한 까닭이다.그러나 치과재료의 생산기관이 없고 다만 舊 조합 재고품의 일부, 日人 치과의의 방매품이 약간 있을 뿐이요, 미국제품을 수입하지 안는 한 고갈 상태에 陷入하고 있는 오늘날 商人만이 늘었다는 것은 건전치 못한 奇現象이다.그러면 치과 상공계는 엇지될 것인가!!! 이 문제를 말하기 전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아 조선의 치과계는 환희 속에서 당면 문제에 대응하느라 분주했습니다. 치과계 최초의 종합지로 1946년 5월 1일에 발간된 『朝鮮齒界』 창간호에는 당시 치과계 구성원들이 어떤 생각을 하였고 무엇을 위해 노력했는지 생생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 내용을 연재하면서 70년 전 선배들과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당시의 맞춤법이 지금과 적잖이 다르지만 원문 그대로 두었습니다. 정리: 조영수■ 齒科醫 사명의 재인식과 질적 진보 향상에 대하야온세계를 털어 유례가 없은 폭학 奸忍 搾取的인 일본 팟오는 1945년 8월 15일로 완전 자취를 감추고 우리 삼천리 강토에는 따듯한 春光이 빗취었으니 이로서 우리 삼천만 동포에게는 해방의 날이 오게 된 것이다.과도기에 있어서 신조선 국가 건설에 딸어 진보된 후생부문은 건설 도정에 있고 조선치과의사회는 대동단결되야 씩씩한 발전을 보이고 임에 우리 민족 유일한 치과의학부는 선배 제 선생의 진력으로 착착 再建 草創의 잇어 머지않은 장래 歐美치과의학에 나란히 됨에 至함을 빌어 축복한다.이 모-든 씩씩한 進步이야말로 모-든 건설 일부인 후생부문 건설에 日子 단축에 도움 됨이 지대한 것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아 조선의 치과계는 환희 속에서 당면 문제에 대응하느라 분주했습니다. 치과계 최초의 종합지로 1946년 5월 1일에 발간된 『朝鮮齒界』 창간호에는 당시 치과계 구성원들이 어떤 생각을 하였고 무엇을 위해 노력했는지 생생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 내용을 연재하면서 70년 전 선배들과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당시의 맞춤법이 지금과 적잖이 다르지만 원문 그대로 두었습니다. 정리: 조영수■ 시골 齒科醫 한 사람의 생각현대의 치과의사는 金冠 義齒의 治術 이외에 口顎炎 질환의 진료의무가 있다. 방금의 환자는 齒性 질환의 全部를, 전부의 치료법을 치과의사에게 切望하고 있다.頰部가 腫脹되었다, 人中부가 종창되었다. 어서어서 외과의사에게 가시오, 소생은 금관 의치가 전문입니다. 이래서는 환자는 만족치 않을 것이다. 문명은 개발되어 치과는 의학의 分科이며 안과이니 이비과이니 산부인과 등과 비하여 대등의 인식을 갖게 되는 現時에 회피 타령 말고 뜻한 바보담 그 報酬 적음의 口顎炎 환자는 날로 우리 眼前에 나타날 것이외다. 금관 의치 제작에 兩手를 더럽히며 분주한 우리 치과전문의인 이상 萬難을 忍耐코 以上의 질환을 치료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