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대학을 졸업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정년을 맞아 대학에서 퇴출된 것도 벌써 10년이 되었다. 50년 넘게 치과의사 노릇을 하면서 나름대로 긍지와 보람을 가지고 이 분야에서 일해 왔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자책감도 생긴다. 필자의 지금까지의 치과의사 생활은 치과의사가 됐음에 대한 ‘안도감’과 치과의사가 된 것에 대한 ‘후회’가 뒤범벅이 된 갈등의 연속이었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치과의사가 된다는 사실이 그다지 자랑스럽지 못한 시절(1960)에 대학을 다녔던 세대가 필자의 세대였다. 그 시절에는 치의학의 수준은 물론 일반 국민들의 치과에 대한 인식도 그만큼 낮았기 때문에 치과의사란 직업 자체가 그다지 자랑스러운 직업이 될 수 없었음이 당연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시대의 흐름에 힘입어 지금에 와선 치의학에 대한 선호도가 상위권으로 비약하게 된 현실로 우리 눈앞에 나타나 있다. 이러한 현실은 암울했던 시절을 겪었던 기성세대, 특히 필자 같은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환상적인 변화기이기 때문에 오히려 당혹스러움과 갈등을 겪게 된다. 그러나 이런 변화는 원인이나 근거가 없이 자연발생적인 사회현상이 아니고 보면 우리 기성세
주위의 동료치과의사의 갑작스런 비보를 접하거나 또는 무슨 병환이나 치명적인 질환에 걸렸다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놀라움과 슬픔이 이루 말할 수 없다. 필자는 최근에 절친한 친구(이상철 교수, 최부병 교수, 김일봉 박사)를 타계로 보낸 바 있었다. 그 비보의 내용이 단순한 노환(老患)에 의해서 오래 신음하고 있는 경우가 아니고 얼마전까지만 해도 자기직업에 활력있고 정열적으로 일해오던 분들이 갑자기 당하게 되는 우발적인 경우는 더 충격적이고 놀라움이 더욱 크다. 치과의사란 직업 때문에 겪어야하는 특수환경에 노출돼 있는 우리들만의 고충과 애로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치과치료행위만큼 특이하고 힘드는 일도 드물 것이라 생각된다. 구강(口腔)이라는 좁은 공간내에서 행해지는 복잡하고 섬세하고 난해한 작업에 한치의 소홀함이나 실수도 용서될 수 없는 정확함과 과학성을 요구하는 우리들의 작업에서 오는 긴장과 스트레스는 우리들만의 고충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특히 환자들과 가장 긴밀한 간격에서 접촉하면서 치료를 해야하는 상황에서 호흡기질환에 대한 무방비상태라던가 구강이라는 특수환경 때문에 완전무균처리를 할 수 없는 불안감, 자주 찍어대야하는 방사선촬영의 노출이나 수은이나 합성수지
바다에서 서식하는 바다조개도 수온의 변화나 밀물, 썰물과 같은 외계에서 일어나는 여러 변화에 따라 조개의 조직에 그 변화의 차이가 생긴다고 한다. 사람의 경우도 생체의 자율신경이나 홀몬의 활동은 외계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됨은 물론이다. 치아도 그 예외는 아닐 것이다. 외관상 치아는 둔탁하고 딱딱한 모양으로 돼 있지만 그 내부에서는 조수의 밀물과 썰물, 달이 차고 기우는 것과 같은 외계(外界)의 리듬의 변화에 따라 치아 내부의 성분인 칼슘, 인 등의 신진대사가 달라지는등 치아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으며 마음의 변화에 따라서도 치아의 생리가 변화되고 있다. 치아속의 체액은 즐거울 때는 치수에서 치아표면쪽으로 흐르고 슬플때나 노여울때는 그 반대 방향으로 흐른다는 사실을 미국 로마린다 대학의 스타인 교수가 약리학적으로 증명한 사실이 있다. 동물실험에서 설탕을 전혀 공급하지 않아도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상태를 만들어주면 치아우식률이 높아진다는 사실도 증명되고 있다. "사람은 사람 나름대로의 치아와 구강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어떤 식생활을 하고 어떤 감정으로 사람을 대하고 자기하는 일에 얼마나 만족하느냐 등의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일들에 대한 생
오래된 일이긴 하지만 모 방송국 프로그램에서 치과의사를 모델로 한 코미디 프로그램이 방영된 일이 있었다. 그것을 본 어느 치과의사 한 분이 격분해 방송국에 항의전화를 하고 사과성명을 내라고 흥분을 했던 사건이 있었던 기억이 난다. 기실 그 코미디 내용은 그렇게 격분할 정도의 파렴치한 내용도 아니었던 것 같다. 방송국의 묵살로 매듭지어졌고 그 후에도 모르긴 하지만 치과의사가 소재로 된 코미디가 자주 만들어졌을 것이라 생각된다. 모든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자기직업에 대한 약간의 천박한 풍자를 한다고 모두가 격분한다면 이 세상에 코미디의 소재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코미디의 가장 좋은 소재는 사람이기 때문에 누군가가 모델이 돼주어야만 우리들에게 순간적인 풋풋한 웃음이라도 나누어주지 않겠는가?지금 코미디 소재의 필요성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려는 게 아니라 왜 어느 치과의사가 그렇게 격분하고 흥분하게 됐는가를 한 번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그냥 웃어넘겨 버릴 수도 있는 일을 자기의 자존심을 손상한 심각한 일로 받아들인 그 치과의사가 대범하지 못하고 옹졸했다고도 생각할 수도 또한 없는 일이다. 그러나 코미디에서 다룬 치과의사의 소재는 어느 특정한 치과의사
치의학 교과서에서 치과치료란 optimal Health(건강), optimal Function(기능), optimal Esthetic(심미)을 만들어 주는 것이 치과치료의 근본 목적으로 돼 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관심 있게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은 “optimal”이란 수식어가 앞에 붙어 있는 까닭을 되씹어 볼 필요가 있다. 이 말의 뜻은 우리말로 딱히 번역하기가 어렵지만 “적절한”, “최적의” 란 뜻으로 될 듯싶다. “적절한”이란 표현은 적당히 넘어가자는 뜻이 아니라 질병을 치료하는데 "나름대로" 최선의 치료를 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또한 완전무결한(absolute) 치료란 있을 수가 없다는 뜻도 된다. 그러나 우리는 지나치게 자기의 치료가 완전무결하기를 바라거나 또 완전무결한 것으로 강조하려는 경향도 없지 않다.이렇게 치료해두면 얼마나 사용할 수 있을까요? 라는 질문을 환자들로부터 받을 때 매우 당혹스러움을 느낄 때가 많다. 족집게 무당처럼 치료한 치아의 수명까지 알아 맞춰야 할 의무는 없지만 환자에게 납득할 만한 대답을 해 주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생겨날 수 있다. 완전무결한 치료가 없을 진데 영구불멸하게 사용 할 수 있는 치료법도 있을
옛날 못살았던 시절, 입(口腔)은 단순히 먹고 살아가는 생존 본능적인 도구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제 어떻게 하면 더 맛있고 더 즐겁게 음식을 먹을 수 있나 하는 쾌락의 경지에서 구강의 역할을 생각하게 됐다. 구강은 단순히 생존보존의 저작기능을 넘어, 쾌락과 심미와 리비도의 개념으로 생각하는 현대인의 필수 감각의 원천적인 도구로서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부분이 됐다.요즈음 직장이나 사무실에서 점심식사 후 틈만 있으면 화장실 같은 곳에서 열심히 이 닦기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흔히 접하게 된다. 구강청결에 대한 인식이 높아진 탓도 있지만 대인 관계에 있어 혹시 상대편에게 불쾌한 입냄새를 풍겨 실례가 되지 않을까 염려해, 예의를 갖춘다는 뜻에서 입안관리에 신경을 쓰는 것 같다. 입냄새는 본인이 스스로 냄새를 느끼는 경우보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느끼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자칫 소홀히 하면 남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으므로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좁은 방이나 엘리베이터, 승용차나 만원버스 등 타인과 상당시간 얼굴을 마주보며 접촉하지 않으면 안될 경우에 입냄새는 그 사람의 교양이나 인격을 나타내는 척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최근에 이런 입냄새 제거를 위
질병이 과학적으로 인식되지 못했던 원시시대에는 질병은 악마나 악령들의 저주 때문에 생겨 인간의 능력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하며 다만 주술사나 마술사를 통해 어떤 의식을 통해 악령을 쫓고 화려한 춤으로 환자를 황홀하게 만들어 신비로움과 편안함을 주는 것으로 치유의 효과를 얻으려 했다. 마법과 신비로움이 의학적 치료의 본질이었다. 그 신비 속에는 저항할 수 없는 힘이 있었고 두려움마저 느끼게 하였으며 그때 의사의 역할은 권위가 있었고 초자연적인 존재와 연결되어 있는 듯한 경외심과 신비로움이 있었다. 지금 이 시대의 의사 역할은 환자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환자들을 질병에 대해 학생처럼 교육시키고 함께 치료과정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의사의 역할은 마치 치료사인 동시에 교사(敎師)가 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치료의 모형이라 생각하고 있다. 과학이 질병을 해결하는 열쇠가 되면서 환자들도 이론적으로 의료과학의 일부를 습득하게 되었고 어느 정도 의사가 질병을 치료하고 다스리는데 동조 내지 도움을 주는 책임마저도 갖게 된 것이다. 옛날에 있었던 의식과 신비 속에 있었던 진정한 열정과 위험을 초월하는 힘이 현대의학에서는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대신 최첨단 기술로 포장된 화
현대 산업사회의 가장 큰 비극은 인간의 생활이 어떤 제도나 규범에 예속된 인간이 점차 소외되고 인간의 존엄성이 침해 받고 있다는 점이 아닐까 생각된다. 개인의 인간성이나 개성, 독창성 등이 거대한 문명이란 이름의 톱니바퀴 속의 부속품처럼 전락돼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러한 사실은 보건의료 분야에도 예외는 아니다.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전으로 첨단의료장비와 의술이 개발되어 보다 정확한 진단과 효과적인 치료의 혜택을 마음껏 누리고 있지만 그 반면에 의료에서 점점 인간(사람)이 빠져 나가고 있다는 사실은 숨길 수 없게 됐다. 의술에서 인간성 경시현상이 발생되는 원인은 의료제도의 문제, 사회구조적 문제, 의학교육의 문제 그리고, 정치, 경제적 문제까지를 포함하는 매우 다양한 측면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인간경시의 근본원인은 환자 중심으로 생각하고 환자의 인격을 존중하는 정신을 실천하는데 의료인 자신들의 적극적인 의지가 부족하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의사들이 질병을 치료하는 행위는 표면화된 신체적인 이상증상만을 해소하는데 주력하고 궁극적으로 질병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환자를 치료하는 데는 실패하고 있다는 모순을 범하고 있는 셈이다. 질병자체에 대한 지식을 가
옛날 우리 의료인들은 누구에게나 침해 받지 않는 귀족적인 위치를 향유해 왔음을 부인 할 수 없는 일이다. 국가 시책으로 보험제도가 도입되고 의사, 치과의사 숫자가 타의에 의해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되면서 의료의 과잉 생산시대에 접어들게 된 것이다. 정부관료적인 사고는 의사의 숫자를 많이 늘려 놓으면 저절로 의사들의 콧대가 꺾일 것이고 따라서, 문턱도 낮아지게 될 것이라는 극히 공리적인 계산에서 나온 사회주의적 발상이 지금 우리 의사들을 곤경에 빠뜨리고 환자들도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 보험제도에 의한 의료행위의 획일화 내지 규격화 되면서 치료자체가 일종의 상품 같은 품목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의료행위를 상품과 마찬가지로 포장을 해서 그 값을 일정하게 매김 해 놓고 환자들에게 팔아 치우는 행위나 뭐 다를 게 있는가? 한마디로 말해서 의료의 품위와 권위가 실추된 것이다. 노래를 부르는 가수들도 노래 부르는 숫자대로 값을 받지 않고 그 가수의 인기도나 경륜에 따라 스테이지 단위로 개런티가 결정되며, 식당에서 파는 음식인 경우 똑같은 자장면도 고급식당이나 어떤 그릇에 담아 파느냐에 따라 그 값이 차이가 있거늘 하물며 의술의 경우에만 유독 보험이란 미명하에 획일적인
대학에서 학생들의 임상 교육을 시키는 치료법의 기본 근간은 교과서를 중심으로 교육을 시키게 마련이다. 치료의 원리나 방법의 모든 것이 교과서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교육을 마치고 실제 사회에 나가 환자를 보면 뜻하지 않게 교과서에서 배운 지식들이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경우도 만나게 된다. 이론과 실제 사이의 괴리를 맞보게 되는 것이다. 필자는 대학의 의학교육을 산을 오르는 등산법과 비유하기를 좋아한다. 대학에서는 산을 오르는 방법과 내려오는 방법은 분명히 가르친다. 산을 오를 때 어떤 장비를 구비해야 하고, 재난을 만났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것 등은 분명하게 교육하고 연습도 시킨다. 그러나 산에서 느껴야 하는 산속에 내포되어 있는 산의 신비와 정취에 대해서는 가르칠 방법이 없다. 산의 깊이는 산을 자꾸 오르내리다 보면 그 산의 진수를 언젠가는 깨닫게 되는 것처럼 임상 지식도 교과서에 의해서만 얻을 수 없고 어떤 교수의 강의에 의해서 만도 얻을 수 없는 자기 자신만이 터득해서 얻어 낼 수 밖에 없는 진리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임상치료는 산의 신비함과 오묘함을 내포하며 산속의 기후변화처럼 다변적이고 갈피를 잡기 힘들 수도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