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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중 칼럼

소설의 품격 : 황석영 3

[임철중의 거꾸로 보는 세상] - <157>


   초딩 때 윤백남의 소설 ‘흑두건’을 읽었다.  배경이 인조반정 전후였던가?

 천하장사들이 만나 힘을 겨루는데, 갑이 손가락으로 굵은 호두알을 아작 깨뜨리자 을은 두툼한 엽전을 종이처럼 접는다.  부엌에서 딱딱 소리가 나서 가보니 한 총각이 아궁이 앞에 앉아 팔뚝만한 참나무를 가볍게 분질러가며 불을 땐다.  과장인 줄 알면서도 지붕 위를 훨훨 날아다니는 영웅호걸들의 활극에 가슴이 뛰었다.  일제의 강압 하에서 개화기를 맞은 선배들은 역사극처럼 제한된 소재로 흥미위주의 글을 많이 썼고, 이런 풍조는 극한적인 대립과 전쟁으로 멍들었던 해방 후에로 이어졌다. 

 어려운 시절일수록 사람들은 영웅호걸에 열광하고, 주인공은 영어로 히어로·히로인 아닌가?   어쨌든 이광수의 ‘단종애사’ 김동인의 ‘젊은 그들’ 박종화의 ‘금삼의피’는 우리의 역사관에도 큰 영향을 주었고, 소재가 무궁무진한 세계적인 문화재 이조실록 덕분에, 사극은 여전히 소설·드라마의 노다지판이다.


   사극 DNA는 7-80년대 3대 구라 황석영 조정래 최인호로 꽃을 피우는데, 출세작 ‘장길산’의 이미지가 너무 강렬했던 탓인지, 황 작가는 스스로를 얘기꾼(Story Teller)이라며 자세를 낮춘다.  창조적이고 인문학(Humanity: 文史哲)에 근접한 작품을 쓰면 문학 즉 소설가(Literature: Novelist)요, 장르에 기울면 흥미작가(Entertainer: 코믹 추리 호러 등)이며, 중간의 대다수는 얘기꾼이다.  작고한 최인호의 대표적인 대하 역사소설 ‘상도’는 재미있는 에피소드로 가득하고, 출세작 ‘별들의 고향’은 당시 시대상(像)을 아기자기하게 기록한 보석 같은 타임캡슐이다.  고교 때에 등단하여 최연소 신문연재(별들의 고향)로 황석영을 월반했지만, 그보다 ‘재미’에서도 단연 뛰어난다.  조정래는 5백년 내공의 배롱나무를 품은 선암사 대처승 아들로 태어나, 분단의 모순이 빚은 미성년자 관람불가의 폭력·잔학·고통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성장하였다.  황·최와 같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도 없고 자의반 타의반 오랜 숙성기간을 거친 덕분인지, 40이 다되어 집필을 시작한 ‘태백산맥’에는 굳이 사상 따위의 양념을 치지 않아도, 거대한 산맥에 필적하는 울림이 있다.  ‘상도’와 ‘태백산맥’ 사이에 끼어, ‘장길산’은 “어느 도적이야기”로 앉아서 강등당한 셈이다. 

 다시 그들 전후에 박경리·이문열·김훈의 세 거목이 있다.  ‘토지’는 이조실록을 빌리지 않고도, 펄 벅의 ‘대지’를 능가하는 민족의 수난사와, “지는 것이 이기는” 인내를 그려낸 대 서사시다.  흉포한 잡새들의 망동으로 세기적인 성취에는 비록 못 미쳤을지 몰라도, 이문열씨는 한국문학의 지평을 넓힌, 우리시대에 몇 안 되는 ‘진정한 소설가’다.  늦깎이로 등단한(1948생, 46세) 김훈은, 2001 칼의 노래 2004 현의 노래 2007 남한산성 등 장편 역사소설의 대세로서, 연필로 꾹꾹 눌러쓴 담백한 문장은 국경을 넘나든지 오래다.  이런 평가에 필자의 편견이 좀 섞였을지 모르나, 어차피 이 칼럼의 큰 제목은 ‘거꾸로 보는 세상’ 아닌가?


   대통령도 그만두면 황룡유회란다.  누구나 자신의 성취에는 아쉬움이 남고, 대수롭지 않던 동년배가 늙어가며 새삼 달라 보이는 것도 인생의 흐름이다.  곱게 받아들이지 못하면, 위에서 밟고 밑에서 치받아 나만 뒤쳐지는 듯, 조바심에 시달린다. 

 자신의 성취에 자부심을 갖고 새 길(Second Career)을 찾아서 조금은 천천히 걷자. 

 황 작가는 무엇이 조급해서 조변석개하는 변혁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새로운 업을 지으려는가.  흘러간 물이 물레방아를 돌리려함도 과대망상의 하나다.  노인의 지혜는 후대의 세상사를 결정하는(Decision Maker) 것이 아니라, 결정을 돕고 조언하는(Advisor)데 써야, 존경도 받고 자식 같은 내 소설의 품격도 다시 한 번 빛난다.





글: 임철중
전 대한치과의사협회 대의원총회의장
임철중 치과의원 원장
대전고등법원 민사조정위원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