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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살, 살, 살 더 잘 살아 보자꾸나'

[詩가 있는 풍경 31] 이영혜 원장의 '살많은 여자'



나를 입고 내가 두른 살들과 한 몸으로 여기까지 왔다
오행이 다 들어와 있다는 내 사주팔자에도 필시
살(肉) 사이사이 마블링처럼 살(煞)이 끼어 있음이 틀림없는데
내 안과 밖의 살들은 내 정신과 육체의 실존이어서

나의 상징이자 정체성이었던 볼살 허벅지살에
생존을 위한 애교살 애살에 엄살까지… 더해 가며…
살들과의 전쟁에서 하루도 자유롭지 못했지만, 모질지 못하여
한 근의 살도 쉽게 덜어내지 못했다.

울 엄마 난산에 나, 몸에 피를 묻히고 태어났는지
도화살에 뭇 남자들이 던져준 난분분 꽃잎으로 쉬이 붉게 물들었고
역마살에 마음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계절마다 가슴앓이, 고독과 벗해왔으며
백정의 드센 팔자라는 백호살에 손에 피 묻히며 살풀이하듯 살아왔다

하지만, 나
불화하던 오랜 살들과 조금은 화해하게 되었으니
볼살 허벅지살은 동안과 젊음의 대세가 되었고
도화살 덕분에 시인 이름 얻었을 것이고
역마살 타고 내 발걸음은 세상 저 멀리 달려나갈 것이며
외과 계통 의사들에게 백호살이 많다니
내 직업 선택을 자위함이다

차도르나 브르카 안에 내 안팍의 살 다 가리고
그대 앞에 서고 싶었으나…

나 이제, 늘어나는 뱃살 나잇살 주름살까지
영영 동행할 나의 실존으로 받아들이려 하니
살아 살아, 나의 살들아!
사라지지 않아도 좋으니,
우리 살, 살, 살 더 잘 살아 보자꾸나



[치인문학]

'치인문학'은 치과의사문인회가 시와 수필 소설 등 회원들의 작품을 모아 격년마다 발행하는 일종의 무크지입니다. 지난 연말에 6호를 냈으니 벌써 10년을 이어왔다는 계산이 됩니다.

한 권의 책을 만드는 작업은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더구나 문예지는 원고를 모으고 배열하는 밑 작업 자체가 전체 공정의 80%를 차지합니다. 그러니 안 봐도 훤합니다. 환자를 보는 틈틈이 밀린 숙제하듯 원고를 다듬자니 그 마음들이 얼마나 조급했을까요?

치인문학 6호에는 모두 34편의 시가 실려 있습니다. 김영훈, 김평일, 신덕재, 윤양하, 이승룡, 이영혜, 이재윤, 임용철, 임창하, 정재영 원장의 작품들입니다. 이 가운데 위에 소개드린 '살많은 여자'는 이영혜 원장의 작품. 살과 함께 나이 들어가는 중년 여성의 채념을 익살스럽게 표현해낸 수작이죠. 이 원장은 2008년 '불교문예'를 통해 등단한 시인입니다.

아래는 치인문학 6호에 함께 실린 임용철 원장의 짧은 시 '산수유' 전문. 


마지막 눈꽃송이 바람에 날리면
봄날 첫 무대에 오를 시간

단아한 노란 빛깔 비녀를 꽂고

나도 그이처럼
매양 새로운 삶을
오롯이 살아내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