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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행4연 通仁詩 계승에 힘 쏟을 것"

시집 여섯권 펴낸 치문회 초대회장 김영훈 원장

통인시장을 지나 옥인동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길 왼편으로 ‘김영훈 치과’가 나타난다. 거기가 거기지만, 선생은 길 건너 창성동 쪽에서 치과를 하다가 지금의 자리로 옮겨 왔다. 67년에 개원해 지금에 이르도록 그는 한국의 근현대사가 공존하는, 그래서 공기마저 달라 보이는 이 통인 · 옥인 일대를 떠나본 적이 없다.

무거운 유리문을 밀고 시인의 치과를 들어서면 벽 위에서 방문객을 맞는 액자 하나와 마주친다. 자세히 올려다보면 통인시 ‘내 고향 대나무’를 그림과 함께 쓴 시화임을 알 수 있다.

이 시 내 고향 대나무는 ‘먼 고향 찾어 갔더니 / 작은 집들은 사라지고 / 대숲이 푸른 날개처럼 / 집 한 채를 품고 있다’로 시작한다. 첫 연을 읽었을 뿐인데도 작가와 무척이나 닮은 작품이라는 느낌이 든다. 선생을 굳이 나무에 비유하자면 대나무 외엔 떠올릴 나무가 없다. 그는 대처럼 곧은데다 죽처럼 강직하고, 댓잎처럼 푸르면서 쉬지 않고 흙을 밀어 올리는 죽순만큼 부지런하다.

그런 근성으로 선생은 환자를 보는 틈틈이 500여편의 시를 토해냈고, 그 분신 같은 시어들을 6권의 시집 속에 오롯이 담아냈다. 1984년 월간문학을 통해 등단한 선생의 첫 시집은 89년에 펴낸 ‘꿈으로 날으는 새’이다. 이 시집은 당시 문익환 목사를 따라 북한에까지 갔다가 책 표지가 TV 카메라에 잡히는 바람에 유명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선생이 펴낸 이른바 ‘자유시’ 형식의 시집은 이 한권이 전부다. 이후 선생은 기승전결로 풀어내는 4행4연 정형시의 매력에 흠뻑 빠졌고, 스스로 창안한 이 시 형식에  ‘통인시’라는 이름까지 붙였다. 

“통인시는 기승전결 4행을 다시 기승전결 4연으로 표현하는 4행 4연 시 형식이에요. 대상이 무엇이건 사물이나 현상을 그려내는데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꾸준히, 30년 동안 6권의 시집을 내고 나니 이제는 문단에서도 제법 통인시를 알아봐줍니다. 저로서야 고마운 일이지요. 하하~”



‘참새로 울든 까치로 울든 모두가 바람’


치과에서 나와 곧바로 오른쪽 골목으로 꺾어 들면 솟은 듯 인왕산이 눈앞을 가리는데, 골목을 따라 100여 미터를 더 올라가 왼편으로 눈을 주면 그곳이 바로 선생의 거처이다. 옛 한옥을 지난 IMF 때 5층짜리 조그만 현대식 건물로 개축했다. 아래층은 세를 주고 4층을 생활공간으로, 5층을 서재로 사용한다.

엘리베이터로 5층 서재에 올라서자 선생은 창부터 열어젖혔다. 도심 같지 않은 상큼한 바람이 금방 코끝으로 스며들고, 내려다보이는 옛 동네며 잡힐 듯 가까운 인왕산과 북악산에, 마을과 잘 어우러진 녹색들이 여간 정겹지가 않다. 이런 느낌을 말씀드렸더니 선생은 별것 아니라는 듯 여기저기 책장을 뒤져 시집부터 잔뜩 안고 나온다. 모두 선생이 ‘시인 김영훈’의 이름으로 펴낸 열 손가락 같은 작품집들이다.

‘꿈으로 날으는 새’ ‘가시덤불에 맺힌 이슬’ ‘바람타고 크는 나무’ ‘꽃이 별이 될 때’ ‘모두가 바람이다’ ‘通仁詩’. 통인시 일역집까지 7권의 시집을 펼쳐놓고 사진을 찍는데, 이번에는 ‘이렇게도 한번’ ‘저렇게도 한번’ 옆에서 계속 참견이시다. 그만큼 애정이 큰 탓이다.

-30여년을 시를 쓰셨는데, 인세나 원고료 수입도 적지 않을 테지요?

“없진 않지만, 우리나라에서 원고료 제대로 받는 시인이 얼마나 되겠어요. 그런 점에서 치과의사라는 직업이 전 무척 고맙습니다. 누구에게 손 벌리는 법 없이, 가족들 눈치 안보고 언제든 시작에 매달릴 수 있거든요.”

-치과에선 아무래도 진료 때문에 집중이 어려우실 테고, 주로 집에서 시를 쓰시나요?

“서재에서 구상을 하고, 진료 틈틈이 정리도 합니다. 시적 재료를 얻는 데엔 점심시간을 주로 활용해요. 전철을 이용해 맛있는 것 먹으러 혼자 종로3가에도 나가고, 안국동에도 나가거든요. 오가는 사이 거리 풍경도 감상하고, 이것저것 생각도 하고 또 소화도 시킬 수 있어 일석삼조예요. 하하”

-문단 사람들과도 교류가 많으시겠군요.

“종로문인협회와 펜클럽 한국본부에서 오래 활동하다 보니 문인들과도 가끔 어울리는 편입니다. 조병하 선생님은 저에게 많은 추억을 남기셨어요. 성춘복 선생님은 제가 월간문학으로 등단할 때 심사를 맡으셨고, 오인문 소설가와는 요즘에도 자주 얘기를 나눕니다. 치문회는 12년 전에 발족해 꾸준히 회원들을 늘여왔는데, 여기서도 서로에게 문학적으로 새로운 모습들을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무척 소중한 모임이죠. 문학을 좋아하는 후배들의 참여가 늘면 한국문학 발전에도 도움이 되지 않겠어요?”

-치과의사와 시인 중 마지막까지 갖고 가고 싶은 이름은 어떤 것인가요?

“詩作은 정신적인 활동입니다. 반대로 치과의사는 하고 싶어도 물리적으로 힘들어지는 시기가 반드시 와요. 요즘 나이가 들어가니 환자가 왔다 가면 치료한 게 잘못되지는 않았을까 가끔씩 궁금해질 때가 있어요. 치과를 그만 둘 때가 된 거라고 생각해요. 그럼 이젠 온전히 시인으로 살아야겠죠.”

-그럼 시인 혹은 문인으로는 뭘 더 이루고 싶으신거죠?

“통인시를 계승 발전시키는 데 힘을 쏟고 싶습니다. 그리고 여건이 되면 소설에도 한번 도전을 해보고 싶어요.” 



‘여건 되면 소설에도 도전해 볼 생각’


김영훈 선생과 함께 옥인동의 골목을 다시 걸어 내려왔다. 그리고 ‘김영훈치과’라고 크게 간판을 단 그의 일터 앞에 섰다. 치과를 찍자고 카메라를 들이대자 선생께서 ‘치과 앞에서 찍은 사진이 한 장도 없다’며, 모델이 돼줄 것을 자청하셨다.

연세에도 불구하고 뷰파인더 안의 선생은 여전히 카랑카랑해 보였다. 그걸 문학적 날카로움으로 치환하자 비로소 화면에 온화한 빛이 돌기 시작했다. 그 거리와 치과와 선생이 하나로 잘 어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