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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윤숙 칼럼

닦으면 빛나는 것

[황윤숙의 깨알 줍기] - <7>


우리 집 컴퓨터 앞에는 작은 스프링 노트 한권이 놓여 있다.
앞 페이지부터는 해야 할 일들을 적어 가고, 뒷 페이지에는 일상의 삶 속에 필요한 것들을 적어 놓는다. 필요한 것인즉 우유, 달걀, 세제 등으로 구매 물품 목록이 적혀 있다. 그리고 항상 스프링 노트의 장점을 이용하여 한 장이 뜯어 가며 산다. 

해야 하는 일들의 페이지에 순번은 일상적으로 20번에 육박하지만 어떤 때는 한자리 수에서 끝나는 행운이 있기도 하다. 해야 할 일은 대부분은 시급함에 의해 순번이 정해진다. 그렇게 번호를 달고 순번에 의해 해야 할 일들을 적어 두고도 또 마음에 슬그머니 핑계가 생긴다. ‘이건 밤에도 할 수 있어, 또 이건은 조용할 때 해야 해’. ‘음~ 이 문제는 의논하면서 해야 하고, 이건 시간이 많이 필요해’. 그러다 보면 순번을 여러 번 고쳐 가며 정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뒤로 밀린 일들이 있기 마련이다. 필자에게 있어 뒤로 밀리는 일 대부분이 집안일이다. 아마도 이러한 일들이 덮어 두면 잠시 조금은 불편하지만 여러 사람을 불편하지 않게 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표시 안 나기도 하고.


아침에 눈을 뜨니 아직 내게 금·토·일 이라는 삼일의 추석연휴가 남아 있다. 편하게 아침을 먹은 후 뜨겁고 달달한 커피 한잔에 약간 단단하게 얼려 둔 초코파이 하나를 손에 들고 “1박2일” 재방송을 보면서 느긋한 아침의 휴일을 맞이하였다.
아~~~~ 삼일. 그리고 해야 할 일 목록을 쳐다보니 휴~... 삼일로는 역부족이지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해야 할 일 목록에 적혀 있지도 않은 일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2주 전에 이사를 했다. 박스를 쌓아 두고 못 보는 지라 이것저것 자리를 정해 수납을 하고 식구들에게 위치를 공지했다. 빨래를 정리하는 사람도 사용하는 사람도 불편함 없이 양말과 속옷 등은 안정적으로 찾아 사용하는 듯하다. 그러나 한 사람, 유독 나만 불편하다. 요즘 지은 아파트는 과거 아파트와는 공간이 달라 수납장이 풍부해지고 오픈된 공간들이 많아졌다. 특히 30년 넘은 아파트에서 생활한 주부에게 지금의 수납공간은 대박~이다. 제사 때마다 대식구 식사를 준비해야 하는지라 가끔 사용하는 여러 주방기구들을 버리지 못하고 가지고 있어야 하기에 어쩌다 한 번 보는 것들이 많았다. 그런데 옛집 찬장 깊숙이 먼지 속에 있었던 것들이 이사 후 손이 닿는 공간으로 진출했고, 그러다 보니 자연히 먼지 낀 묵은 때들이 눈에 띈다. 그 중에 특히 유리와 밝은 색 도기 그릇들이 계속 내가 주부였음을 일깨우며 신경을 자극한다.


결국 사흘 연휴의 첫날은 그릇 닦기에 활용하기로 했다. 싱크대 가득 물을 받아 찬장 한 칸씩 순서대로(요즘 같은 기억력으로는 혹여 그릇이 섞이면 또 배열까지 다시 해야겠기에...) 그릇을 빼내 스폰지 거품 솔로 부드럽게 문지르고, 식탁에 큰 타월을 깔고 말려 수납하기를 반복한다.
먼지 낀 그릇 중에는 어머님께 물려받은 크리스탈 화채그릇과 시집올 때 준비한 외국산 유리(유난히 유리를 좋아하는 취향 덕에) 그릇 세트가 그간 어디 있었는지 이제야 눈에 띈다. 거품으로 목욕한 그릇들은 세월이 지났음에도 남향집 햇살 속에 광택을 내며 반짝인다.

그릇의 광택을 바라보며 미소 짓다 문득 내 주변에 원래는 영롱한 것이었으나 구석에 두었기에 먼지 묻고 때가 끼어 빛을 잃고 있는 것은 없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기가 마른 그릇을 자꾸 부드러운 수건으로 문지른다. 마치 그동안 먼지 속에 있게 한 것에 대한 미안함을 전하기라도 하듯 말이다.
그릇의 원래 용도는 사용하기 편리해야하고, 자신과 잘 어울리는 음식을 담아 일차적으로는 먹는 이의 눈을 통해 식욕을 돋구어 맛나고 편안한 식탁을 만드는데 일조하는 것이 그 역할인데 그릇이 너무 많아 기회를 얻지 못하기도 하고, 또 구석자리에 있어 빛을 보지 못하기도 한다. 또 어떤 경우는 차갑고 투명함이 장점인 유리그릇에 뜨거운 것을 닮아 어울리지 않는 용도로 사용되어 제대로 평가 받지도 못할 경우도 있다.

이제 찬장을 정리하듯이 주변을 좀 살펴봐야겠다. 비록 접시뿐만 아니라 주변의 많은 것들이 먼지 덮힌채 있는 것들은 없는지, 또 기회를 얻지 못해 자신의 장점을 보여 주지 못한 것들은 없는지, 용도에 맞지 않게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은 없는지...

정리를 끝내고 깨끗하고 투명한 유리 접시를 보니 사용하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오늘 저녁 메뉴는 등심구이인데, 투명유리에 고기라... 또 내 욕심이 용도를 벗어난 선택을 하려 한다. 고기는 예쁜 도기 접시에 담고 유리 접시에는 깨끗한 야채를 담아 봐야겠다. 




 


 

 : 황윤숙

한양여자대학교 치위생과 교수

충치예방연구회 공동회장

국민구강건강을 위한 치과위생사 포럼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