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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창인의 밥집 이야기

또 하나의 폭력 - 냉면을 먹으며

[석창인의 밥집 이야기]- <80>


  
부모라는 권력에 의해 혹은 어른이라는 허울 아래 자식들이나 어린 학생들에게 자신의 가치관을 강요하는 경우를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제가 대학 예과 시절 수원에는 야학이 서너 군데 있었습니다. 당시의 야학은 대학생들에게 있어 일종의 유행 비슷한 것이기도 했고, 또 어느 정도 - 이념적 해방구 역할을 했던 - 자기 위로적인 성격이 강했던 장소라 할 수도 있습니다. 제 기억으로 수원에서는 저희 야학을 제외하고 대부분 운동권 학생들이 교사를 맡고 있었지요. 저희들은 그야말로 순수하게 중학교 진학을 하지 못한 학생들을 주로 가르치고 있었고, 최종 목적은 그들에게 중학교 졸업 자격증을 손에 쥐어주는 것입니다. 물론 제가 다녔던 야학은 운영비를 공군부대에서 전액 지원하였기 때문에 반국가적인 일을 도모하기도 어려웠습니다. 

하루는 모 야학에서 학생들이 연극제를 한다면서 초청장이 왔습니다. 그런데 그 연극 내용에 좀 놀랐습니다. 배우(어린 학생)들이 모닥불에 둘러 앉아 고구마를 구워먹으며 자기 회사 사장이나 그 사모 혹은 공장장의 비리를 돌아가면서 이야기 하고, 욕을 하는 내용으로 가득했기 때문이었지요. 그 절정은 마지막에 합창 구호로 "타도하자~! 매판자본~!"... 뭐 대충 이랬던 기억입니다. 30여년이 넘은 지금 그 학생들도 이제 40대의 중년이 되었을 터이고, 또 어엿한 한 가정의 가장이 되었겠지요. 그러나 그 때 형성된 이념 혹은 가치관은 아마도 포르말린에 고정된 실험실의 동물처럼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최근엔 부모들이 자식들을 정규 학교에 보내지 않고 집에서 혹은 산골로 들어가 홈스쿨링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한 때 붐이 일더니 우리나라도 그 바람을 탄 듯 보입니다. 제도권 교육을 불신하고 사회에 대한 저항의식이 강한 부모님들이 대개 자신의 경험칙과 가치관에 따라 그리 결정을 했다고도 볼 수 있는데, 이 역시 아이들에 대한 소유권을 과도히 행사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부모의 종교를 강요하는 경우도 그렇습니다. 부모 입장에서는 당연히 교회, 성당, 절 등에 아이가 같이 가야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아이들은 종교(신)의 절실함이 없는 상태이지요. 제 경우에도 딸아이는 성당을 잘 따라 오는데, 아들은 완전 냉담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힘들고 절실할 때 분명히 성당을 찾겠지요. 그때까지 부모는 기다려주면 됩니다. 살면서 힘들고 지칠 때 적절한 종교를 찾아가는 법을 부지불식간에 부모에게 배우게 되거든요.

부모가 학벌이 높거나 좋은 직업을 가졌다면 그 또한 자식들에겐 무형의 폭력입니다. 심지어 부모의 직업을 이어받도록 강제하는 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이 스스로가 판단하여 그 직업이 보람되고 또 자기 행복을 찾는데 최선이라면 나서서 말려도 그 길을 찾아갈 것입니다.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부모가 드라마에 빠지지 않고 신문이나 책을 읽는 모습만 각인시켜도 그걸로 충분할 겁니다.

그런데 딱 하나 저도 어쩔 수 없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가족과의 식사입니다. 제가 한식(토속음식)을 워낙 좋아하기 때문에 아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서구식 식단이나 말랑말랑한 인스턴트 음식을 접할 일이 드물었습니다. 집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겠고, 외식을 하면서도 저의 폭력은 계속 되었습니다. 아이들과 그 흔한 패밀리 레스토랑을 한 번도 가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지금껏 다 합쳐도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입니다. 대개 전국에 산재한 맛집(죄다 한식)이나 유명한 냉면집이 제 가족의 외식장소임은 불문가지이죠. 그러다보니 시나브로 아이들 입맛도 저한테 ‘튜닝’이 되기 시작하더군요. 아이들 입장에서는 물냉면보다는 비빔냉면을 선호할 텐데 어찌된 일인지 오로지 평양 물냉면입니다. 심지어 강하고 달달한 갈빗집 냉면은 쳐다보지도 않고, ‘밍밍슴슴’한 그런 물냉면만을 찾더라는 것이죠.

물론 자기 친구들과의 외식은 당연히 인스턴트음식이나 양식이겠지만, 적어도 저와의 외식에서는 한 번도 자신들의 의견 제시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어렸을 때부터 저의 독선적 폭력에 순응을 해왔다는 반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한편으로 평양냉면에 푹 빠진 자식들을 보며 놀라운 식도락 유전자의 힘을 확인하고 스스로 흐뭇해하기도 합니다만.



 

 

 

글: 석창인

에스엔유치과병원 대표원장

음식 칼럼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