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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중 칼럼

노 화가의 부음 1 : 분노조절 장애

[임철중의 거꾸로 보는 세상] - <87>

 

   원산지가 일본인 이지메는 힘없는 상대를 집단으로 괴롭히는 비겁한 폭력이다.

  몸이 약하거나 선천장애로 가뜩이나 학교생활이 버거운 학생이 괴로움에 못 이겨 자살이 늘고 있다는데, 이 고약한 풍조가 한국에 들어와, 왕따 피해가 우려할 수준이라고 한다.  라면상무·땅콩공주에 이어 7년 된 장신구를 고쳐내라고 떼를 쓰는 백화점 고객에 이르기까지, 근래에 부쩍 늘어난 ‘갑질’ 사건도 그 뿌리는 같고, 서민 위에 군림하는 공무원은 그 짝퉁쯤 된다. 

 이들이 질이 나쁜 이유는 스스로 풀어야할 스트레스를 ‘을’을 향하여 배설하는 것은 물론, 직·간접적인 이익을 챙기고 기득권을 누리며, 을에게 심성의 파괴라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는 사실이다.  즉 이지메 같은 갑질은 분노조절장애의 화풀이는 물론 결과적으로 상대를 잔인하게 짓밟는, 지극히 악의적인 범죄행위인 것이다.

 

   천경자 화백의 부음이 뒤늦게 전해졌다.  91세로 천수를 누렸으나 12년은 병고에 시달렸고, 미인도 위작(僞作)논란으로 화가에게 생명의 포기나 다름없는 절필을 선언한 이후로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을 터인즉, 개인은 물론 국가적으로도 애석하고 상실감이 크다.  천화백이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그림을 보고, “내 자식을 몰라보겠느냐?”며 위작의혹을 제기하고, 위조 전과범 권춘식씨도 내가 그렸다고 증언했으나, ‘화랑협회 감정평가단’은 ‘진짜’로 판단한 사건이다.  담당 검사는 훗날, “위조하고 안 했다는 사람은 있어도, 진짜라는데 위조했다는 사람은 없다.”라고 두둔한다. 

 늦었지만 한번 살펴보자.  첫째, 화랑은 그림을 거래하는 장터인 동시에 화가의 후원자라는 양면성을 지니므로, 평가단은 화랑 중에 화랑인 미술관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개중에는 까다로운 작가에게 감정을 품었을 수도 있다.  미술관에서 가짜를 구득했다면 권위의 실추는 물론 공무원으로서 책임문제까지 따를 터이니, 평가의 손이 안으로 굽을 개연성이 높다.  둘째, 소장년도가 ‘80년인데 가짜그림은 ‘84년에 그렸다니 그 그림은 가짜일 수 없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84는 권씨가 구치소에서 주간지기자에게 얘기한 희미한 기억에서 시작된 것으로, 일단 활자화되자 판정의 근거로 채택되었을 뿐이다.  그가 그렸다는 증언은 배척하고 그가 말한 정확성도 모호한 년도는 100% 옳다니, 활자의 마술이요 아전인수의 극치다.  셋째, 그밖에 권씨는 사소한듯하지만 결정적인 증언을 보태고 있다.

 예를 들어  천화백이 눈동자를 그릴 때 늘 쓰던 금분(金粉)이 없다든가, 부탁 받아 가짜 미인도를 그리게 된 경위에 대한 구체적인 정황 설명 따위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작가자신의 부정(denunciation)이다.  젊은 시절의 그림이 부끄러워 비싸게 되사들여 불태우는 화가도 있다.  그림은 작가의 얼(靈)이 담긴 창조물이므로 작가의 주장은 감정평가에 우선하여 반드시 존중받아야 한다.

 미술관은 그림을 작가에게 넘기고 작가는 심혈을 기울인 새 작품으로 보답하는, 윈/ 윈 의 선택은 없었을까?  감정평가단이 작가의 진술을 물리치고 미인도를 진품으로 ‘결정(?)’한 것은, 힘센 자의 분노조절장애로 보인다.  ‘횡포에 절필’로 맞선 화가의 대응 또한 분노조절장애의 맞불이었다. 

 날선 대결은 천화백과 그녀가 펼치려던 새로운 예술세계를 파괴하고, 미술사에 부끄러운 오점을 남겼다.  뒤늦게 고인을 지지하는 댓글의 홍수 또한, 고인의 부음 앞에서 이성보다 감정이 승하는, 다른 하나의 어리석음일 수 있다.  자칫, 당당한 순리와 진실의 의미를 깎아내릴지도 모르니까.

 

 

 

 

글: 임철중
전 대한치과의사협회 대의원총회의장
임철중 치과의원 원장
대전고등법원 민사조정위원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