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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중 칼럼

통일의 기운 1 : 7·4 공동성명

[임철중의 거꾸로 보는 세상] - <76>

 

   거대담론으로 풀면 역사의 흐름에 개인의 기여도는 미미하다.  그러나 바로 그 시각 그 자리에 그 인물이 있었던 인연으로 역사와 영웅은 탄생한다.  조잡하고 시커먼 두루마리 화장지를 사려고(배급품), 칼바람 속에 한 블록을 두 바퀴 돌아 줄을 선 모스크바 시민들...  겨우 차례가 되자, “물건 떨어졌어요.” 무뚝뚝한 직원의 한 마디로 상황 끝이다.  1920년대 레닌의 신 경제로부터 70년대까지 국가가 주도하는 기획경제 예찬론자는 늘 있었지만, 제품의 질과 양에서 자유경제에 밀려 거의 용도폐기 되었다. 

 1961-1981, 이 20년 동안 미국 대통령은 케네디·존슨·닉슨·포드·카터의 다섯이다.  통상 연임하여 임기 8년이면 셋으로 충분하나, 암살·재선 포기·탄핵 등 리더십 문제에 두 차례의 오일 쇼크와 베트남전이 겹쳐 기간산업이 도산하는 어려움 속에, 국민은 노조출신 ‘소통의 달인’ 레이건에 기대를 걸었다. 

 레이거노믹스는 통화 공급은 엄격히 하되 대규모 감세와 규제완화로 자유경제를 활성화하는 경제회생 정책이었다.  재선 임기에 들어서자, ‘작은 정부’라는 취지와는 어긋나지만, 냉전체제를 종식시키려는 ‘전략방위구상(SDI: 별들의 전쟁)’으로 Evil Empire 소련을 압박하였다. 

 

   경제파탄과 천문학적인 국방비 경쟁에 코너로 몰린 고르바초프는 1985년 서기장 연설에서,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개혁과 개방)를 선언한다.  소련은 두 번의 올림픽(L.A.·모스크바) 왕따와 KAL기 격추로 국제적으로 고립되고, 영국·중국 간에 홍콩반환 협정이 체결된 시점이었다.  개인의 자주성과 창의성이 담보되지 않는 정책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으며, 국방비절약이 살길임을 인정한 것이다. 

 레이건의 인기는 퇴임(1989) 후에도 식지 않고, 1994년 낸시여사의 알츠하이머 선언에 이어 93세로 사망할 때 까지, 온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냉전 종식의 공로로 199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고르비와 레이건 대통령 두 정치인은, 중국의 등소평과 함께 20세기 후반의 3대 영웅에 틀림이 없다.

   한반도에도 훈풍이 불어올 것인가?  7·4 남북공동성명은 남북통일을 위한 모든 논의의 전채요리이자 메인디시요 디저트다.  한 난세의 간웅이 보신과 출세를 위한 발상이었건, 누가 노벨상을 타는데 활용하였건, 아무개는 임기 말년에 대선의 국면전환용으로 썼건 간에, 자주·평화·민족 대단결이라는 3대 원칙을 포함하여, 통일논의에 불변의 ‘의제 설정(Agenda Setting)’이었다. 

 당시 남북 최고위층은 다 같이 조바심을 느끼고 있었다.  박정희는, 1. 대선(三選)에서 DJ와 근소한 득표차이에 불만과 불안, 2. 주한미군 7사단을 빼고 2사단도 3년 안에 철수한다는 닉슨의 계획, 3. 베트남에서 미군이 철수하면 3년 안에 적화되리라는 예측, 4. 남북 GNP가 겨우 같아지고($316) 국방력은 아직도 멀었는데, 서울서 환갑잔치를 하겠다는 김일성의 공언 등등을 종합하여, 절대 독재체제인 유신(維新)을 확고하게 결심한 상태였다. 

 김일성 역시 남한의 눈부신 발전으로 국력이 역전되는 기미를 깨닫고, 공동성명을 계기로 통일원칙을 내밀어 주한미군 철수와 보안법 폐지를 달성한 뒤, 서울을 점령하여 적화통일을 이루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김·박의 달콤한 동상이몽은 그 후에 남북의 독재경쟁과 대화단절이 오히려 심화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당장에는 변화가 필요하다는 공통분모로 합의문을 만들기까지는 성공했으나, 내심 목표는 정반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장구한 흐름으로 볼 때, 두 지도자의 합의로 통일의 기운이 한 걸음 전진한 것만은 분명하다.  그 후 통일에 관한 모든 논의가 7·4성명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글: 임철중
전 대한치과의사협회 대의원총회의장
임철중 치과의원 원장
대전문화재단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