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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詩가 있는 풍경 15] 유치환의 '행복'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안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망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편지]

낯선 시골의 우체국을 지나다 문득 창문 너머로 편지쓰기에 열중인 청마를 봅니다.
그만큼 이 시는 시어들이 주는 메시지가 강렬합니다.
마치 한용운의 '알 수 없어요'에 나오는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처럼.
옛날 우체국과 그 안의 분위기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청마의 모습을 떠올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겁니다.
우표 붙이는 테이블에 기대 선 채 편지를 쓰는 사람들을 당시엔 자주 볼 수 있었으니까요.
마침내 봉투를 봉해 편지함에 넣고 우체국을 나설 때의 그 뿌듯함이란...
이 시도 그렇게 탄생했다는군요. 그러므로 정확히 말하면 시가 아니라 서간문인 셈입니다만.
그래서 더욱 놀랍습니다. 편지를 이처럼 빛나는 시어들로 빚어 내다니..

청마는 통영여중에서 함께 근무한 이영도 시조시인에게 20년동안 3천여통의 연서를 보냈답니다.
1967년 2월, 청마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다음 시인은 그가 보낸 편지들 중 500편을 모아 시집으로 묶습니다. 이 책의 제목이 바로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 였죠.
청마가 떠난 다음 이영도 시인은 거처를 부산에서 서울로 옮깁니다. 하지만 그 역시 곧 뇌출혈로 세상을 하직하고 맙니다.
아래는 청마를 떠나 보낸 이영도 시인의 마음을 담은 ''이라는 짧은 시 전문.


너는 저만치 가고
나는 여기 섰는데
손 한 번 흔들지 못하고
돌아선 하늘과 땅
애모는 사리로 맺혀
푸른 돌로 굳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