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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중 칼럼

말장난 1: 조선 도공(陶工)

[임철중의 거꾸로 보는 세상] - <72>

 

 

   고소·고발 건수가 일본의 10여배요 재판은 무조건 끝장을 본다는 오기로, 대법관이 일인당 매년 몇 천 건의 기록에 파묻혀, 본연의 업무에 지장이 많다고 한다.  

 재판 끝에 친구가 원수가 되어 국민화합을 해치기도 한다.  따라서 사회경험과 생활의 지혜가 담긴 비 법조인의 중재로 원·피고가 충분한 대화를 거쳐 합의점을 찾는 민사조정은,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막는 동시에 사회통합에도 기여한다는 의미에서, 사법부가 앞장서서 권장하고 있다.  

 고법에서 오랫동안 조정을 하면서 인상 깊었던 한 사건을 소개한다.  임진왜란 때 일본에 끌려간 도공 중에 이삼평씨 기념비가 충남 공주에 있는데, 후손과 일본인 유지들이 뜻을 모아 고향에 세운 것으로, 방학 때면 백제 유적지를 찾는 일본 초중고생들의 수학여행에 필수코스가 되었다.

 

   문제는 비문 중에, “이삼평 씨가 일본으로 ‘건너가’”라는 대목으로, 도공에 대한 존경심에 불타는 이모씨가 이를 ‘끌려가’로 고쳐달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왜적에게 강제로 잡혀간 분을 제 발로 건너갔다고 하면, 일신의 영달을 위해 나라를 버리고 도망간 친일·배신자로 모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관계자나 성금을 모으고 수학여행을 주선해온 일본인들은 펄쩍 뛸 일이었다.  한때 유럽에서 아끼고 동경했던 일본 도예 명품의 원조요 후손들과 일본인의 긍지인 도예예술의 일세가, 침략전쟁의 희생자요 전리품으로 잡혀온 포로라는 사실을, 수학여행 온 학생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비문 수정요구를 거절당한 이모씨는 공원 내 조금 떨어진 장소에 ‘끌려가’가 명시된 새 비석을 세웠고, 현장과 세부상황을 확인하지 못한 당시 시 공무원이 덜컥 허가를 내주었다.  내용이 다른 두 개의 비석에 오리지널 측은(원고) 난감해졌고, 수학여행을 중단함과 동시에 시와 이모씨를 상대로(피고) 새 비석 철거소송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1970년대 정형외과 전문의인 형님이 내과 1인 일반외과 2인과 볼티모어 주택가에서 'Medical Town'을 동업할 때, 변호사와 함께 작성한 계약서가 사전(辭典) 한권만큼 두꺼웠다고 한다.  외래만 보고 검사·입원·수술은 별도의 attending hospital에서 하는 미국 시스템에서도 이러하거늘, “우리가 남이가?”라며 따지면 소인배요 좋은 게 좋다고 얼렁뚱땅 넘어가는 한국풍토에서, 한 번 사고가 터지면 몇 배 고통과 손실이 따른다. 

 민사소송 대부분이 계약 즉 금전문제로, 가장 많은 건설로부터 상속에 이르기까지 공사대금·계금·약정금·양수금·구상금·유산 등 형태는 다양해도, 명분·실리를 조목조목 따져 설득하면, 결국은 양보하고 타협을 한다.

 어려운 것은 사상·신념·종교다.  이 사건도 양측의 신념이 팽팽히 맞서 상고심까지 2년여, 감정이 극도로 격앙된 상태였다.  원고 측 주장에는 한일친선문제, 선의의 학생들에 대한 정신적 충격문제 외에도 신념이 도사리고 있었다.  도공이나 기술자를 천시하는 조선조를 벗어나, 장인(匠人)을 예우하는 일본 막부정권 하에서 날개를 달았기에, 이들이 한껏 기예를 닦아 오늘날까지 그 명성과 전통을 이어올 수 있었다는 주장이다. 

 예외적으로 세 차례에 걸친 마라톤 조정에, 전례 없이 시 직원까지 출석하였다.  마지막 조정 전날 밤 고민 끝에 문득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건너가’는 능동형(能動)이고 ‘끌려가’는 강제(forced)를 전제로 한다.  우리는 잘 안 쓰지만 착한 수동형(受動), ‘건너가게 되어’로 수정하면 ‘본인의 의사(意思)’도 ‘강제’라는 의미도 함께 희석된다.  유체이탈 화법의 냄새는 유감이나, 원·피고가 수긍할 객관성이 확보되면서, 모두가 만족하는 해피엔드로 끝났다.   

 최근 국제사회에 떠오른 ‘단어 풀이’ 시비를 보며 다시 생각나는 사건이다.

 

 

 

 

글: 임철중
전 대한치과의사협회 대의원총회의장
임철중 치과의원 원장
대전문화재단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