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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중 칼럼

숨고르기 2: 풀빵과 메리야스

[임철중의 거꾸로 보는 세상] - <59>

 

   “국수 언제 먹여줄 거야?”  미혼 남녀에게 흔히 던지는 멘트다.  그래서 국수를 장터나 단체회식용 서민음식으로 알지만, 실은 있는 집 아니면 잔치 때나 맛보는 귀하신 몸이었단다.  밀은 보리보다 수확이 늦고 쌀과 이모작이 어려워 생산량도 적었다는데, 전란의 폐허에서 어떻게 칼국수 같은 값 싼 분식이 가능했을까?

 미국과 상호안전보장법(1951)에 의하여, 소위 ‘잉여농산물’로 밀이 대량 공급된 때문이었다.  원조 근거는 미 공법 480호로 단일 화 되었다가, 1963년부터 무상이 아닌 장기차관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칼국수 대전’이 탄생하고, ‘막 파스타’ 칼국수가 배고픈 ‘피난 코리아’를 먹여 살렸다.  밀에는 글루텐이 많아 위장은 낯가림으로 불평을 한다.  밀가루음식의 캡은 본시 빵이지만, 반죽·발효·숙성에 오븐을 거치는 과정은 시간과 품이 드니까, 위를 속이려고 적당히 물과 섞어(?) 무쇠로 된 빵틀에 구워내는 ‘막 빵’을 고안해 낸다.  그것도 막 노동자가 허기를 때우는 값싼 ‘풀빵’과, 그럴듯한 꽃무늬에 달달하게 팥고물이 들어간 ‘국화빵’으로 신분에 차별이 있었다. 

빵에 곁들일 주스는 냉차가 제격이다.  역 오른쪽에 7, 8 가구가 몰려 사는 낡은 일본식가옥이 있었다.  마당 한구석 그늘에 시원한 펌프 물을 담은 드럼통이 있다.  여기에 과일 에센스와 식용색소와 사카린을 소분한 당원(糖元)을 몇 알 넣어 잘 저으면 주스 한 드럼이 완성된다.  꼭지 달린 유리통 에 얼음덩이와 함께 담고 모터달린 팔랑개비가 돌아가면, 달고 시원하기가 진짜 생과일주스 “저리가라”요, 요즘 말로 하면 칼로리 제로의 다이어트 주스였다.

 

   잉여농산물은 주로 원료 재(材)니까 원면(綿)이 양곡의 두 배로 많았다.  인간은 세상없어도 먹고 걸쳐야 사니까.  일제 강점기에 군수공장의 노하우를 터득한 대전에 메리야스공장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섰다.  낡은 기계로 조잡하게 짠 러닝셔츠를 돌 위에 얹어놓고 방망이로 두드려 빠니까, 길어야 석 달이면 구멍이 숭숭 뚫린다. 

 칼국수 골목 근처 친구 집에는 알록달록한 천을 늘 햇볕에 널어놓았다.  메리야스공장에서 나온 폐기물을 담요 같은 천으로 재생하는 가내 수공업이다.  더 험한 쓰레기는 걸레로 부활한다.  불량품은 야시장에서 싸구려로 파니 버릴 것 하나 없다. 

 전기가 귀하여 캄캄한 밤 시장을 밝히고 상품을 돋 보여준 매상의 일등공신은 카바이드 가스등(燈)이다.  냄새가 좀 불쾌할 뿐 밝기는 대낮 같았다.  전후에 돌아가던 공장은, 메리야스·양말의 섬유공장과 가마솥·빵틀·국수틀·빙수기계 만드는 주조 공장, 그리고 양재기·도시락 통을 찍어내는 양은공장 등 초(超)경공업이었다. 

 원동과 대동 사이 철길 밑에 철도국 취수용 물을 잡아두는 ‘포강’이 있었는데, 지금은 물이 마른 길옆으로 빵틀 같은 공산품 가게 몇 채가 황학동처럼 남아 있다.
 이마저 언젠가는 사라지리라.  꾸미도 없는 양푼국수나 풀빵으로 끼니를 때우고, 냉차 한잔으로 땀을 식히는 것이 그나마 일거리가 있는 노동자의 일상이었다.  좀 호사를 부리면 풍미당 가께우동이나 보미당 국화빵이 있었다.  신사숙녀의 우아한 칼질은, 60년대에 대전역사와 상록 그릴의 함박스테키(Hamburg Steak)로 시작된다. 

 

   60년대 중반 대일청구권자금 투입으로 시작된 급격한 발전은 ‘국제시장’ 덕수 이야기 그대로다.  정신없이 뛴 20년의 폭발적 성장 끝에 잠시 땀 식히고 돌아볼 여유와 과열된 중화학공업의 재조정...  다시 경제력과 자신감의 산물인 컬러TV·프로스포츠·통금해제·해외여행 자유화 및 마이카시대의 개막으로 이어졌다. 1983년 이산가족 찾기 방송은 휴전 30년과 고속성장 20년이 맞아 떨어지고, 5천년 역사에 처음으로 민초가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 민족적인 ‘숨고르기’의 신호탄이었다.

 

바로잡기
“숨고르기 1: 거품의 미학과 칼국수”에서, “리우데자네이루의 까미니또 골목”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까미니또“를 착각한 것으로 바로잡습니다.  가본지 10여년 지났다고는 해도 리우와 부에노스를 종종 헷갈리는데, 나만 그런 건가요?  

 

 

 

 


글: 임철중
전 대한치과의사협회 대의원총회의장
임철중 치과의원 원장
대전문화재단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