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9 (금)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작아졌다, 추녀 끝으로 날아 오르는 작은 참새보다

[詩가 있는 풍경 10] 김광규 ‘작은 사내들’

 

작은 사내들

 

작아진다
자꾸만 작아진다
성장을 멈추기 전에 그들은 벌써 작아지기 시작했다
첫사랑을 알기 전에 이미 전쟁을 헤아리며 작아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자꾸만 작아진다
하품을 하다가 뚝 그치며 작아지고
끔찍한 악몽에 몸서리치며 작아지고
노크 소리가 날 때마다 깜짝 놀라 작아지고
푸른 신호등 앞에서도 주춤하다 작아진다
그들은 어서 빨리 늙지 않음을 한탄하며 작아진다
얼굴 가리고 신문을 보며 세상이 너무나 평온하여 작아진다
넥타이를 매고 보기 좋게 일렬로 서서 작아지고
모두가 장사를 해 돈 벌 생각을 하며 작아지고
들리지 않는 명령에 귀 기울이며 작아지고
제복처럼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작아지고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며 작아지고
수많은 모임을 갖고 박수를 치며 작아지고
권력의 점심을 얻어먹고 이를 쑤시며 작아지고
배가 나와 열심히 골프를 치며 작아지고
칵테일 파티에 가서 양주를 마시며 작아지고
이제는 너무 커진 아내를 안으며 작아진다

 

작아졌다
그들은 마침내 작아졌다
마당에서 추녀 끝으로 나는 눈치 빠른 참새보다도 작아졌다
그들은 이제 마스크를 쓴 채 담배를 피울 줄 알고
우습지 않을 때 가장 크게 웃을 줄 알고
슬프지 않은 일도 진지하게 오랫동안 슬퍼할 줄 알고
기쁜 일은 깊숙이 숨겨 둘 줄 알고
모든 분노를 적절하게 계산할 줄 알고
속마음을 이야기 않고 서로들 성난 눈초리로 바라볼 줄 알고
아무도 묻지 않는 의문은 생각하지 않을 줄 알고
미결감을 지날 때마다 자신의 다행함을 느낄 줄 알고
들판에서 춤추는 대신 술집에서 가성으로 노래 부를 줄 알고
사랑할 때도 비경제적인 기다란 애무를 절약할 줄 안다
그렇다
작아졌다
그들은 충분히 작아졌다
성명과 직업과 연령만 남고
그들은 이제 너무 작아져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더 이상 작아질 수 없다


 

[小人]

‘작아진다’는 느낌은 필연적으로 사람을 움츠려들게 만든다.
작아져야 할 구체적인 이유가 없을 때도 마찬가지다.
작아진다는 느낌은 나이가 들수록 자주 출몰한다.
거리를 걷다가 밥을 먹다가 문득, 누군가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에도
한사코 작아진다. 한 번도 큰 적 없이 작아지기만 한다.
인터넷을 뒤지다 작아지고, 다른 잘 쓴 기사를 보며 작아지고,
각종 회장들 앞에서 작아지고, 독자 광고주 앞에서 작아지고,
버릇없는 후배 앞에서 작아지고, 마누라 자식 앞에서 작아진다.
어제 그랬듯 오늘도 작아지고, 내일은 더 작아질 것이지만
그 느낌처럼 오래 된 왜소증은 좀 채 멈출 줄을 모른다.
그야말로 이젠 이름과 직업과 연령만 남겼음에도.

‘작은 사내들’은 1979년에 출간된 김광규 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에 실려 있다. 대개의 시집이 제목을 수록한 시에서 따오지만 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에는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이란 시가 없다.

대신 ‘작은 사내들’이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에도 불구하고 ‘나이 들수록 자꾸만 작아져 마침내 마당에서 추녀 끝으로 날아오르는 눈치 빠른 참새보다도 작아진 초라한 군상들’을 보여주고 있다.

같은 시집에 들어있는 짧은 시 ‘엽서’ 전문. 

 

눈덮인 전나무숲을 지나
오스트리아로 달려가는 급행 열차

민들레 가득한 들판에
암젤의 노랫소리 

알프스를 넘어오는
지중해 바람의 넋

오버바이에른의 가을 마을에
나는 때때로 안개가 되어

가 버린 나에게
편지를 쓴다

 

암젤(Amsel) : 부리는 노랗고 몸은 까만 지빠귀새 종류. 독일의 곳곳에 많이 살며 그 노랫소리가 꾀꼬리처럼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