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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창인의 밥집 이야기

면학의 서(麵學의 書) - 육칠면삼(肉七麵三)에 대하여

[석창인의 밥집 이야기]- <36>



현재 나이가 대략 쉰을 넘기셨다면 무애 양주동 박사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제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2학년 국어교과서에 그 분의 글이 실렸었는데 제목이 '면학의 서'(勉學)였습니다. 안톤 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라는 수필과 함께 양주동 박사의 글이 지금도 새록새록 기억이 나는 이유는 그 만큼 글 솜씨가 좋았다는 뜻이겠지요.

양주동 박사는 스스로 자신을 국보라 칭하실 정도로 여러 분야에서 뛰어난 분이셨는데, 특히 향가 분야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지요. 흔히 조선의 3대 천재라 해서 육당 최남선, 춘원 이광수 그리고 벽초 홍명희를 꼽는 분들도 있지만, 사람에 따라서 정인보와 양주동을 넣기도 합니다. 그 만큼 양주동 박사는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한 획을 그으신 분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면학의 서'에는 다양한 표현(현학적이기도 하고요)이 등장하는데, 이를 기억해두었다 적절히 써먹기도 좋습니다. 박이부정, 박이정, 안광이 지배를 철하다, 남아수독오거서, 고칠현삼, 우수마발... 대충 이런 표현들입니다.

오늘은 고칠현삼(古七現三)을 응용해 보도록 하지요. 고칠현삼은 예전 수원 시내에 있던 클래식 음악감상실 이름이기도 한데, 고전을 칠, 현대문을 삼 정도의 비율로 읽어야 좋다는 뜻입니다. 클래식 음악을 칠, 현대음악이나 대중음악을 삼 비율로 들으라는 말도 되겠지요.

고스톱에서 실력이 우선이냐 아니면 '운빨'이 우선이냐 할 때도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역시 고스톱은 받는 패에 의해 좌우되니까 그런 비율로 표현했겠지요. 물론 초절정 고수들은 '기오운오'까지도 말합디다만...

한 번 더 응용하자면, 요즘 이과를 지원하는 고등학생들이 많이 줄어서 걱정이라지요? 국가가 발전하려면 탁상공론 위주의 인문계보다 현장에서 뭘 만들어 낼 수 있는 자연계가 많아야 좋다고들 합니다만, 수학과 과학이 어렵다고 다들 기피하니 나라의 미래가 암울합니다. 여하튼 저희가 학교에 다닐 때는 이칠문삼(理七文三)이었습니다.(여학교는 문과가 많았던가요?) 게다가 최우수 그룹들은 거의 이과를 선택했었지요. 저희 십년 이상 선배들 때도 이런 비율이었으니 현재 우리나라가 이만큼이라도 버티는 게 아닌지요. 지금의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포스코 등등 세계적인 기업군을 이룬 주인공들이 자연계 출신들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요즘은 불행히도 문칠이삼 비율로 문과가 많다고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냉면을 논할 때, 저는 육수(국물)에 칠, 면발에 삼 정도로 배분하여 평가 합니다 (결국 육칠면삼인 게지요). 그만큼 평양 물냉면의 핵심은 육수에 있습니다. 면은 어느 정도 반열에 오르면 다 고부고부(五分五分)입니다. 옛날엔 꿩이나 닭 삶은 육수에 동치미 국물을 섞어 국물을 만들었다지만, 요즘은 꿩고기를 사용하는 곳도 드물고 기본적으로 동치미는 겨울 음식이라 요즘과 같은 염천 더위에는 구하기도 어렵습니다. ‘남포면옥처럼 아예 식당 마당에 항아리를 묻고 거기서 매일 꺼내서 쓴다면 모를까. 최근에는 양지머리 같은 부위만 쓰거나 돼지고기와 사골 잡뼈 등도 같이 넣어 우려내기도 하고 대전 숯골원냉면처럼 닭고기로 육수를 내기도 합니다만, 동치미를 제대로 섞어서 내는 곳은 드뭅니다. 동치미 구하기가 어려우니 아예 식초를 뿌려서 동치미의 시큼함을 재현하는 것이지요.

제가 과음한 다음날 해장하는데 냉면육수를 최고로 치는 이유가 맑은 고기국물을 차갑게 낸 것이라 칼로리와 영양가는 물론이요, 혼돈스러운 머리를 한 방에 정리하는 시원함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름이 문제입니다. 냉면은 겨울음식인데 요즘은 동치미 국물이 없는 냉면을 만들다보니 여름이 이제 냉면 계절이 되었습니다. 보통 냉면집 주인들은 새벽부터 고기국물을 우려내 그날 사용할 육수를 만들어둡니다. 이 작업에 워낙 많은 시간이 소요되므로 바쁜 낮에는 육수를 또 만들기가 어렵습니다. 하여, 제대로 된 냉면집은 육수가 떨어지면 바로 영업을 종료합니다. 그러나 엉터리로 냉면을 내는 곳은 마법의 가루인지 뭔지를 타서 뚝딱 만들어 내거나 대충 고기를 우린 물에 조미료 팍팍 넣어서 만들기 때문에 저녁 늦게까지도 냉면 주문을 받습니다.

그런데 육수를 제대로는 만들지만 손님을 더 받고 싶은 식당도 있겠지요. 그렇다면 어떤 꼼수를 쓸까요? 생각할 것도 없이 평소보다 육수를 줄여서 제공하면 되지 않겠어요? 그래도 너무 많이 줄이면 티가 나니까 대략 삼분의 일 정도만 적게 부어줍디다.

하여, 냉면을 너무 늦게 먹으러 가면 육수가 현저히 모자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냉면 육수로 시원하게 해장을 하러 갔는데 면을 헤집어야 겨우 국물이 보인다면 참으로 낭패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상은 양주동 박사의 '면학의 서(勉學)' 내용을 한번 응용한 석박사의 '면학의 서(麵學)'였습니다(고등학교 국어시간으로 잠시 되돌아가고 싶으신 분은 첨부한 '면학의 서'를 한 번 읽어보세요. 냉면 못지않은 시원한 청량감이 밀려올 것입니다).

평소 냉면 한 그릇만 먹어도 배가 불렀는데, 오늘은 육수가 이게 뭡니까?

 

면을 풀어헤치니 아예 육수가 보이질 않습니다. 물경 11,000 원짜리 냉면인데 말입니다. 솔직히 냉면 값이 만 원이라면 저는 칠천 원이 육수 값이요, 삼천 원이 면 값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냉면계의 이단아인 진주냉면입니다. 후에 또 말씀드리겠지만, 진주냉면은 냉면이라기보다는 그냥 '진주면'이라고 불러야 할 정도로 기존의 통념을 뒤집습니다.

 

진주냉면을 풀어헤쳐보니 역시 육수가 보이질 않네요. 주문한 지 1분도 안되어 나오는 냉면임에도, 면은 이미 퍼졌고 식감은 쫄면입니다.

 

                                                             양주동 - 면학의 

독서(讀書)의 즐거움! 이에 대해서는 이미 동서(東西) 전배(前輩)들의 무수(無數)한 언급(言及)이 있으니, 다시 무엇을 덧붙이랴. 좀 과장(課長)하여 말한다면, 그야말로 맹자(孟子)의 인생 삼락(人生三樂)에 모름지기 '독서(讀書), 면학(勉學)'의 제 4일락(第四一樂)을 추가(追加)할 것이다. 진부(陳腐)한 인문(引文)이나 만인(萬人) 주지(周知)의 평범(平凡)한 일화(逸話) 따위는 일체 그만두고, 단적(端的)으로 나의 실감(實感) 하나를 피력(披瀝)하기로 하자.

열 살 전후 때에 논어(論語)를 처음 보고, 그 첫머리에 나오는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

운운(云云)이 대성현(大聖賢)의 글의 모두(冒頭)로 너무나 평범한 데 놀랐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이런 말씀이면 공자(孔子) 아닌 소, 중학생도 넉넉히 말함직하였다. 첫 줄에서의 나의 실망은 그 밑의 정자(程子)인가의 약간 현학적(衒學的)인 주석(註釋)에 의하여 다소 그 도()를 완화(緩和)하였으나 논어의 허두(虛頭)가 너무나 평범하다는 인상(印象)은 오래 가시지 않았다. 그랬더니 그 후 배우고, 익히고, 또 무엇을 남에게 가르친다는 생활이 어느덧 2, 30, 그 동안에 비록 대수로운 성취(成就)는 없었으나, 몸에 저리게 느껴지는 것은 다시금 평범한 그 말이 진리(眞理)이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정씨(程氏)의 주()는 워낙 군소리요, 공자의 당초(當初) 소박(素朴)한 표현이 그대로 고마운 말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현세(現世)와 같은 명리(名利)와 허화(虛華)의 와중(渦中)을 될 수 있는 한 초탈(超脫)하여, 하루에 단 몇 시, 몇 분이라도 오로지 진리와 구도(求道)에 고요히 침잠(沈潛)하는 여유(餘裕)를 가질 수 있음이, 부생백년(浮生百年), 더구나 현대인에게 얼마나 행복된 일인가! 하물며, 난후(亂後) 수복(收復)의 구차(苟且)한 생활 속에서 그래도 나에게 삼척 안두(三尺案頭)가 마련되어 있고, 일수(一穗)의 청등(靑燈)이 의미한 채로 빛을 내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일전(日前) 어느 문생(門生)이 내 저서(著書)에 제자(題字)를 청하기로, 나는 공자의 이 평범하고도 고마운 말을 실감(實感)으로 서증(書贈)하였다.

독서란 즐거운 마음으로 할 것이다. 이것이 나의 지설(持說)이다. 세상에는 실제적(實際的) 목적을 가진, 실리 실득(實利實得)을 위한 독서를 주장할 이가 많겠지마는 아무리 그것을 위한 독서라도, 기쁨 없이는 애초에 실효(實效)를 거둘 수 없다. 독서이 효과를 가지는 방법은 요컨대 그 즐거움을 양성(養成)함이다. 선천적(先天的)으로 그 즐거움에 민감(敏感)한 이야 그야말로 다생(多生)의 숙인(宿因)으로 다복(多福)한 사람이겠지만, 어렸을 적부터 독서에 재미를 붙여 그 습관을 잘 길러 놓은 이도, 그만 못지않은 행복한 족속(族屬)이다.

독서의 즐거움은 현실파(現實派)에게나 이상가(理想家)에게나, 다 공통(共通)히 발견의 기쁨에 있다. 콜럼버스적인 새로운 사실(事實)과 지식의 영역(領域)의 발견도 좋고, "하늘의 무지개를 바로보면 내 가슴은 뛰노나." 식의 워즈워스적인 영감(靈感), 경건(敬虔)의 발견도 좋고, 더구나 나와 같이, 에머슨의 말에 따라, "천재(天才)의 작품에서 내버렸던 자아(自我)를 발견함"은 더 좋은 일이다. 요컨대, 부단(不斷)의 즐거움은 맨 처음 '경이감(驚異感)'에서 발원(發源)되어 진리의 바다에 흘러가는 것이다. 주지(周知)하는 대로 '채프먼의 호머를 처음 보았을 때'에서 키츠는 이미 우리의 느끼는 바를 대변(代辯)하였다.

그 때 나는 마치 어떤 천체(天體)의 감시자(監視者)가 시계(視界) 안에 한 새 유성(遊星)의 허엄침을 본 듯, 또는 장대(壯大)한 코르테스가 독수리 같은 눈으로 태평양(太平洋)을 응시(凝視)하고모든 그의 부하(部下)들은 미친 듯 놀라 피차에 바라보는 듯말없이 다리엔의 한 봉우리를.

혹은 이미 정평(定評)있는 고전(古典)을 읽으라, 혹은 가장 새로운 세대(세대(世代)를 호흡(呼吸)한 신서(新書)를 더 읽으라, 각인(各人)에게는 각양(各樣)의 견해(見解)와 각자(各自)의 권설(勸說)이 있다. 전자는 가로되,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후자(後者)는 말한다.

"생동(生動)하는 세대(世代)를 호흡(呼吸)하라."

그러나 아무래도 한편으로만 기울어질 수 없는 일이요, 또 그럴 필요도 없다. 지식인(知識人)으로서 동서(東西)의 대표적인 고전은 필경(畢竟) 섭렵(涉獵)하여야 할 터이요, 문화인(文化人)으로서 초현대적(超現代的)인 교양(敎養)에 일보(一步)라도 낙오(落伍)될 수는 없다. 문제는 각자의 취미와 성격과 목적과 교양에 의한 비율(比率)뿐인데, 그것 역시 강요하거나 일률(一律)로 규정(規定)할 것은 못된다. 누구는 '고칠 현삼제(古七現三制)'를 취하는 버릇이 있으나, 그것도 오히려 치우친 생각이요, 중용(中庸)이 좋다고나 할까?

다독(多讀)이냐 정독(精讀)이냐가 또한 물음의 대상(對象)이 된다.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는 전자의 주장이나, '박이부정(博而不精)'이 그 통폐(通弊), '안광(眼光)'이 지배(紙背)를 철(徹)함'은 나무를 보고 숲을 보지 못함이 또한 그 약점(弱點)이다. 아무튼, 독서의 목적이 '모래를 헤쳐 금을 캐어 냄'에 있다면, 필경(畢竟) '()''()'을 겸()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것 역시 평범(平凡)하나마 '박이정(博而精) 석 자를 표어(標語)로 삼아야 하겠다. '()''()'은 차라리 변증법적(辨證法的)으로 통일되어야 할 것아니, 우리는 양자(兩者)의 개념(槪念)을 궁극적(窮極的)으로 초극(超克)하여야 할 것이다. 송인(宋人)의 다음 시구는 면학(勉學)에 대해서도 그대로 알맞은 경계(境界)이다.

벌판 다한 곳이 청산인데, (平蕪盡處是靑山)

행인은 다시 청산 밖에 있네. (行人更在靑山外)

나는 이 글에서 독서의 즐거움을 종시(終始) 역설(力說)하여 왔거니와, 그 즐거움의 흐름은 왕양(汪洋)한 심충(深衷)의 바다에 도달(到達)하기 전에, 우선 기구(崎嶇), 간난(艱難), 칠전팔도(七顚八倒)의 괴로움의 협곡(峽谷)을 수없이 경과(經過)함을 요함이 무론(毋論)이다. 깊디 깊은 진리의 탐구(探究)나 구도적(求道的)인 독서는 말할 것도 없겠으나, 심상(尋常)한 학습(學習)에서도 서늘한 즐거움은 항시 '애씀의 땀'을 씻은 뒤에 배가(倍加)된다. 비근(卑近)한 일례(一例), 요새는 그래도 스승도 많고 서적(書籍)도 흔하여 면학의 초보적(初步的)인 애로(隘路)는 적으니, 학생 제군(學生諸君)은 나의 소년 시절(少年時節)보다는 덜 애쓴다고 본다. 나는 어렸을 때에 그야말로 한적(漢籍) 수백 권을 모조리 남에게 빌어다기 철야(徹夜), 종일(終日) 베껴서 읽었고, 한문(漢文)은 워낙 무사독학(無師獨學), 수학(數學)조차도 혼자 애써서 깨쳤다. 그 괴로움이 얼마나 하였을까마는, 독서 연진(硏眞)의 취미와 즐거움은 그 속에서 터득, 양성되었음을 솔직(率直)이 고백한다.

끝으로 소화 일편(笑話一片)내가 12, 3세 때이니, 거금(距今) 50년 전의 일이다. 영어(英語)를 독학(獨學)하는데, 그 즐거움이야말로 한문만 일과(日課)로 삼던 나에게는 칼라일의 이른바 '새로운 하늘과 땅(new heaven and earth)'이었다. 그런데 그 독학서(獨學書) 문법 설명의 '삼인칭 단수(三人稱單數)'란 말의 뜻을 나는 몰라, '독서 백편 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이란 고언(古諺)만 믿고 밤낮 며칠을 그 항목(項目)만 자꾸 염독(念讀)하였으나, 종시 '의자현(義自見)'이 안 되어, 마침내 어느 겨울날 이른 아침, 눈길 30리를 걸어 읍내(邑內)에 들어가 보통 학교(普通學校) 교장을 찾아 물어 보았으나, 그분 역시 모르겠노라 한다. 다행히 젊은 신임 교원(新任敎員)에게 그 말뜻을 설명(說明) 받아 알았을 때의 그 기쁨이란! 나는 그 날, 왕복(往復) 60리의 피곤한 몸으로 집으로 돌아와, 하도 기뻐서 저녁도 안 먹고 밤새도록 책상에 마주 앉아, 적어 가지고 온 그 말뜻의 메모를 독서하였다. 가로되,

"내가 일인칭(一人稱), 너는 이인칭(二人稱), 나와 너 외엔 우수마발(牛杏馬勃)이 다 삼인칭야(三人稱也)."

 

 

 

글: 석창인

에스엔유치과병원 대표원장

음식 칼럼리스트